2012, 임진년

난기류

by 김동의

중국 합자법인이 있는 베이징으로 10일간 출장을 가게 됐다. 현지 조립 인력에게 기술 지원을 해 줄 현장 기술직 네 분과 업무 일지와 문제점 발췌가 주된 내용의 보고서 작성을 위한 연구직 인력으로는 내가 참석하게 됐다.


입사 5년 차에 얻게 된 첫 해외출장 기회였다. 파트장이 나름 안배하여 그 기회를 부여한 듯하지만 미운털 박힌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는 야근의 미덕을 보이는 남들보다 한참 늦게 순서가 온 느낌이다. 이왕 갈 거 선진 구라파 쪽을 내심 바랐는데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는 이웃 나라에 한 번쯤 방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중국 하면 사람만 많고 낙후된 도심이 즐비한 곳으로 인식됐지만 도착한 베이징 공항은 인천국제공항과 다름없어 보였다. 베이징에서도 한참 외곽에 위치한 합자 법인 공장과 접근성이 괜찮은 금자은 호텔을 숙소로 미리 예약해 두었다. 호텔 측에서 공항으로 마중 나온 흰색 승합차량은 80년대 초반 기아 봉고가 연상됐는데 내장 트림(trim) 같은 건 죄다 생략돼 실내 측 차체의 상당 부분이 그대로 노출된 관계로 탑승 시 냉장고 안에 담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1월의 베이징 공기는 몹시 한랭하고 건조했다. 도착해서 짐을 푼 금자은 호텔은 다소 촌스럽게 여겨진 상호에서 비롯된 우려와는 다르게 깔끔하고 쾌적한 비즈니스호텔다운 콘디숀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漢族)은 믿을 사람 하나 없으니 조심하라며 당부하던 호텔 측 매니저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고 스스로를 조선족이라고 소개했는데 출장 기간 내내 여행 가이드와 같이 여러모로 큰 도움을 주었다.


지금처럼 웨이씬이나 디디추싱이 보급·확산됐던 시기는 아니어서 공장으로 출근할 때면 호텔 매니저가 택시를 호출해 줬고 대체 어딜 보고 택시로 인정해야 할지 모를 허름한 일반 승용차가 우리를 태우고 공장 정문까지 빠르고 위태롭게 이동했다. 땅이 넓은 나라답게 도로도 광활하고 신호등도 곳곳에 잘 설치됐지만 이곳 차량들은 아포칼립스 영화에서처럼 신호를 무시하거나 빈번하게 역주행을 했다.


이곳에서도 나의 두 번째 스마트 기기인 5인치 초대형화면 DELL社의 Streak 폰의 원활한 사용을 위해 미리 포켓 Wi-Fi를 대여했는데 함께 온 출장자는 물론 현지 직원까지 죄다 연결을 하곤 내 주위를 맴돌았다. 이 환경을 이용해 당시 팀 내에서 유행했던 게임인 <Rule the sky>를 중국에서도 도태되지 않도록 틈틈이 하며 공장 한 편의 테이블에서 업무를 봤다.


한 기술직 출장자는 왜 너만 앉아서 노트북으로 일하냐며, 종종 현장에 나와 바닥에 흩뿌려진 오일이라도 페이퍼 타월로 닦으라는 신박한 주장을 폈는데 무탈히 출장을 마치고자 그의 말대로 해줬다. 그 외에는 매일같이 붙어있다 보니 현장 선배들과 부쩍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이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출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과를 마치고 쉬는데 나와 한두 살 터울인 선배 두 분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두 남자는 아까완 달리 몹시 포멀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내게 어서 빨리 노래방을 가자며 춥고 어두운 밤길을 나섰다. 멀지 않은 건물에 ‘OO 브라이트’라는 간판이 붙어있었고 그곳으로 들어가니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장 아주머니가 방을 안내했다. '노래 부를 거면서 웬 정장 차림?' 하는 의아함을 품던 순간 약 스무 명의 소저들이 매우 간소한 차림으로 우리 방에 난입해 도열했다.


최소 40개의 눈이 우리에게 집중됐는데 내 눈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선배들은 연장자 순으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기로 했고 그들의 선택이 끝나고 내 차례가 왔을 땐 수줍은 듯 구석에 서서 나와 눈이 마주친 처자를 선택했다. 이들은 도우미라고 불렸고 노래도 거의 부르지 않는 내가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일은 전무할 듯한데 옆의 선배들은 그녀들의 도움을 받은 듯 무척이나 흥겹게 가무를 즐겼다.


울려 퍼지는 노래와 반주음은 차치하더라도 어눌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내 옆의 처자와의 원활한 토커바웃을 이어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녀는 한족이고 내겐 조선족을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해줬는데 두 세력 간에 내가 모르는 전쟁이 있었나 싶었다. 이어서 새로 장만한 삼성 갤럭시 노트1 폰을 보여주었고 LG에서 일을 하다가 지금은 악세사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베이징 번호판이 달린 차량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자랑하듯 말했다.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예쁘장한 얼굴로 배고플까 봐 준비했다며 "오뽜" 하고 내민 햄버거의 온기가 기억에 따스하게 남아있다.


출장 마지막 날 자주 가던 뒷골목 김치찌개 집으로 향하다가 한 건물에 설치된 실외기용 철재 프레임을 미처 못 보고 부딪혀 머리끝에서 피가 나기 시작해 얼굴까지 주르륵 흐르는 사고를 겪었다. 식당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그나마 중국어 공부를 많이 해둔 선배와 근처 건물 1층에 위치한 병원에 들어섰더니 흰 가운을 걸친 의사 양반이 치료를 위해서는 머리를 모두 밀어야 한다고 했다. 선배와 나는 고민하다가 금방 한국에 갈 수 있으니 화장지 지혈로 버텨보기로 했고 인천국제공항에 당도하자마자 지하 공항의료센터를 찾아 간단히 상처를 봉합함으로써 소중한 머리털을 지켜낼 수 있었다.




우리 팀 최초로 여성 연구원이 입사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녀를 일찌감치 면접관으로 만나본 파트장은 면접 질문에 110점짜리 답변을 한 인재를 들였다며 드물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런 인물이 내 직속 후임이 됐다. 나의 어눌한 말들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일을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 백 명을 훌쩍 넘는 팀원 중에 유일한 홍일점이기에 금방 그만두고 이직해 버릴까 봐 나름 최선을 다해 그녀를 대했다.


이런저런 교육으로 부재하게 되면 그녀의 일도 대신해주기도 했고 휴게실도 자주 데리고 다니며 늘 이곳에서 다뤄지는 칙칙한 소재가 아닌 최대한 밝고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려 애썼다. 누군가의 생일 따위 아무렇지 않았던 남탕 무드를 깨고 이례적으로 그녀의 생일에 그녀가 애정하는 캐릭터 인형을 보내주기도 했다. 주량도 세고 공대 출신이어서 그런지 곧잘 적응하는 듯하여 참 다행이었다.


그녀를 의식해서인지 파트 운영이 뜻대로 잘 안 돼서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파트장은 기존의 획일화된 술자리 위주의 회식 분위기를 벗어나 색다른 소통의 장을 열어보자며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인 내게 '소통&화합 위원장'이란 억지 타이틀을 지어내 붙였다.


나는 파트 내 자주 소통하지 않는 책임급과 연구원급을 묶어 조를 짰고 영화나 야구 경기 관람과 같은 건전한 액티비티를 위주로 퇴근 후 소통 활동을 유도했다. 파트 단위 1박 야유회도 문경 짚라인 체험 등을 넣어봤지만 술이 곁들여진 회식문화의 관성을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종전과 같은 1/N 회식은 계속됐고 신입 대상 충성주 이벤트도 빠짐이 없었다.




집안의 우환과 불화는 여전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준 신용카드를 모두 잘라버리겠다는 극단적인 말을 일삼았고 엄마는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상동 헬스장 아주머니들의 보폭에 맞추다 보니 일상이 고달파 보였다. 마침 월세를 올리겠다는 집주인 말에 이번만큼은 외진 동네로 이사해 엄마의 소비패턴을 바꿔보고자 했던 아빠의 마음을 또 읽지 못하고 맹한 장남은 전세 대출을 알아볼 테니 부천 상동 거주를 유지하자고 했다. 그래도 은행 이자는 살인적인 월세에 비해 자비로웠다.


엄마로 인해 발생한 사천만 원 이외에 또다시 억대의 빚이 생기게 됐다. 이번에도 이자는 아빠의 월급에서 부담한다고 했다. 이제 막 대학 학자금과 부서져버린 중고차 값을 상환했는데 나의 잉여 재산은 언제 만나볼지 기약이 없어 보였다. 어찌 됐든 전세 보증금 마련으로 같은 건물 다른 호수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집만 옮겼지 결론이 나지 않는 부모님의 다툼은 소모적이고 구질구질하며 좋은 기운이라곤 죄다 내쫓는 듯하여 하루속히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홀로 괴로워하고 벗어나고자 몸부림쳐봐도 상황은 나아짐이 없었다.


유부남이 된 N 연구원은 주말에 시간이 되면 함께 모델하우스 구경을 가자고 했다. 내게 모델하우스란 금전적 여유가 아주 많고 부모님 또래의 한참 어른들이나 드나드는 장소로 여겼는데 N 놈이 장가를 가더니 꽤 어른 인척 하는구나 싶어서 그딴 덴 관심도 돈도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돈이 없어도 분양가의 10%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대출로 충당해서 버티다가 매도할 수 있다는 설명을 쏙 빼두고 N 연구원은 열심히 모델하우스 투어를 하며 아파트를 줍줍하고 있었다. 대출 걱정에 여자 만날 궁리만 가득해 나날이 추레해지는 나와 대조적으로 N은 차곡차곡 자산 형성을 하며 낯빛도 복스럽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심통이 나고 N이 얄밉다.


팀 내 동갑내기 연구원들도 하나 둘 기혼자가 돼버렸고 파트 후배들까지 연달아 결혼에 성공했다. 나는 군대, 졸업, 취직에 이어 결혼마저 뒤처지는 루저가 확실시되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토요일 신사동에서 파트 후배의 결혼식이 있었다. 후배의 앞 날을 진심으로 축복해 주었지만 나의 일상화된 고독함이 한층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은 날이었다. 역시 싱글인 N 연구원의 동기 P 연구원도 폴 스미스 정장을 입고 있지만 이날만큼은 마냥 유쾌해 보이진 않았다.


식을 마친 후 P 연구원에게 바로 건너편에 있는 리버사이드호텔 나이트클럽에나 가보자고 제안했다. 음주 가무라고는 1g도 못 하지만 왠지 오늘은 저곳에 가야 할 것만 같았다. 너무나 포멀한 P 연구원의 착장을 개선할 목적으로 가로수길 ALAND에 방문해 트렌디하면서도 돈 많아 보이는 차림으로 face lift 해봤다. 그렇게 자신감을 충전하고 나서 현금 45만 원을 마련해 나이트클럽의 룸 하나를 점유했다.


수차례 방 문을 열어 처자들을 이끌고 들어오는 웨이터의 노고에 감복하여 돈도 없는 주제에 담뱃값을 쥐여줬다. 그렇게 입장한 이름 모를 여인네들은 우릴 쓱 둘러보곤 1분도 채 안 돼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나가버렸다. 웨이터가 새로운 처자들을 또 데리고 오면 내가 문 앞에 서서 감금하다시피 막아볼까 하다가 그건 좀 흉해 보여 생각에 그쳤다.


또 한 커플의 처자들이 웨이터에게 긴급체포되어 입장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티 없이 맑은 피부와 쌍꺼풀 없이 수수한 얼굴에 단발머리를 했는데 이곳을 거쳐간 다른 여성들과는 색다른 매력에 이끌렸다. 대화중 공백이 생기면 아까 왔던 여자들처럼 화장실에 가버릴까 두려워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다가 함께 온 일행이 나갈 채비를 할 즈음 그녀의 이름과 번호를 5인치 휴대기기에 큼지막하게 남겼다.


벌써 새벽 네 시가 넘었고 우리 둘은 비싼 룸에서 완전히 새(鳥)가 될 각이다. 담당 웨이터는 격무로 기절했는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만 집으로 가자고 P 연구원에게 말을 꺼내보지만 약간의 취기가 더해진 그는 자신이 오늘을 위해 옷도 사고 거금을 썼는데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며 영업이 끝날 때까지 의지를 불태우려는 듯하다가 갑자기 룸 안에 있던 노래방 기기의 마이크를 뽑아 들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격정적으로 불렀다. 그 광경을 끝으로 지하에서 빠져나와 한껏 기름진 얼굴과 시린 눈으로 인한 불쾌함을 참으며 집으로 향했다.


씻고 아침 숙면에 들기 전에 번호를 알게 된 그녀에게 문자를 남겨봤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답장이 왔고 그렇게 방송 제작 부문 후리랜서인 그녀와 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연애의 시작은 늘 흐뭇했다.


주말 휴일이 너무 금방 지나갔고 평일 퇴근 후 서부간선도로를 뚫고 잠시 그녀를 본 시간은 더욱 짧게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집은 지긋지긋한데 이참에 인생 첫 독립 내지는 탈출을 감행했다. 장소는 회사 셔틀이 운행되는 북방한계선인 영등포구 당산동으로 결정했고 공인중개사를 찾아 비교적 깔끔한 원룸을 1000에 40으로 얻게 됐다. 반려견 중 막내로 오게 된 모카가 커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벗어났다.


우리 집에 온 아기 모카


까만 벨로스터에 옷가지를 눌러 담고 다이소에서 최소한의 식기를 구입해 감나무집 2층으로 입주하게 됐다. 이런... 나의 소중한 벨로스터의 자리를 간과했다. 주차난이 엄청난 동네라 마땅히 차를 세워둘 곳이 없었고 감나무집 대문 앞에 주차를 했다가는 집주인 할아버지의 제네시스가 나가야 된다며 언제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그 스트레스 때문에 독감 예방 접종을 한 날 극심한 감기 몸살을 앓았다. 우연히 인근 삼환 아파트에 거주 중인 동기를 만났고 그에게 부탁해 매달 월 주차비를 지급하며 주차증을 얻어낼 수 있었다. 조금 걸어 다녀야 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심각하게 야행성인 새 연인은 어느 날 내가 잠든 사이 내 폰 안의 네이버와 네이트 메일을 열어 나의 본질을 탐구해 보고자 했나 보다.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녀로부터 매서운 손바닥이 날아와 내 뺨을 세차게 쳤다. 방이 무너져 전등이 얼굴로 떨어졌나 싶어 매우 놀란 채로 일어나 그녀의 얼굴을 보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붉어진 아이라인 위로 눈물이 맺혀있다.


내 메일에는 나를 스쳐간 소저들과의 사진이나 대화 내용 같은 것들이 미처 삭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나는 다 지난 일일 뿐이라고 호소해 봤지만 그녀를 말로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에게 나는 구제불능한 쓰레기이자 양아치 혹은 껄떡쇠에 불과했다. 대역 죄인의 심정으로 빌고 뉘우치고 또다시 비는 공을 들여서야 비로소 그녀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새벽 6시 5분까지 당산역 비둘기 분변을 피해 2001 OUTLET(이후 NC백화점이었다가 현재는 일반 건물로 운영) 앞에 대기 중인 셔틀에 필히 탑승해야 하거늘 새벽 세 시부터 뺨을 맞은 것도 모자라 며칠을 사죄하느라 매달리니 몸과 마음이 망가지다 못해 불타버릴 것만 같았다.


그땐 모든 여성들이 그 정도의 예민함과 고집을 지닌 것으로 알았고 다들 이처럼 힘겹게 꾹 참고 맞추며 살아가는구나 싶었다. 그녀를 만난 후 독립을 이룸으로써 1년 365일 24시간 꽉 막힌 서부간선도로처럼 답 없는 내 인생에 조금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아 어쩌면 염원이었던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그녀에 맞춰 이리저리 휘둘렸다.


대통령 선거 시즌에도 포털 기사의 댓글에 휘둘려 오늘은 문재인이 옳구나 싶다가도 내일은 박근혜가 옳은 것 같았다. 스윙보터로 포장된 어리석은 33살 김 씨는 온갖 휘둘림에 탈진해 버릴 것 같은 육신을 돌보느라 꼭 참석하리라 마음먹었던 투표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34살을 향해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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