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zen
연초부터 우연히 《드림하이》라는 드롸마를 보았다. 내용은 도저히 낯간지러워서 못 봐줄 정도였지만 작년에 데뷔한 miss A 수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큼 꾹 참고 초반 몇 화만 봤다. 그녀가 발연기로 뭇매를 맞으면 내가 다 속상할 것 같았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건강미가 넘쳤던 당시의 수지가 말 그대로 이상형이었는데 내가 아쉽다고 한들 어쩌겠냐만 지금은 그때의 모습이 사라져 조금 아쉽다.
눈이 많이 왔던 다음 날인 1월 28일 금요일은 8시간 근태인정이 되는 사외 교육 날이었다. 팀 내부 고객인 한 책임연구원께서 의뢰한 일이 있었고 결과물은 그다음 주에 회신해도 충분했지만 소신 있는 정시퇴근주의자는 꼭 오늘 제출하고 마음 편히 교육에 참여하고 말겠다는 고집에 여섯 시도 안된 새벽부터 새빨간 투스카니를 끌고 사무실로 향했다.
어둑한 313번 지방도를 1차선으로 달리다가 앞 차에 가려져 있던 중앙분리봉이 불쑥 튀어나와 내 차와 닿을 것 같았다. 놀란 마음에 스티어링 휠을 살짝 틀며 제동을 했는데 중앙분리봉 쪽에 밀집된 블랙아이스를 밟고 놀이동산의 회전 컵마냥 차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차체 제어 불가 상태로 돌던 내 차는 중앙분리대를 뚫고 편도 3차선인 반대편 차선까지 침범해서도 회전을 멈출 줄을 모르다가 작은 하천과 도로를 나누고 있는 둔덕과 충돌해서야 잦아들었다.
기적적으로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던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상대도 크게 다치거나 생을 달리했을 것이다. 차가 회전하던 찰나 길을 밝히던 주황빛 가로등과 멀찌감치 서 비추던 차량의 전조등 때문에 문득 야간 스키를 타다가 넘어지던 순간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렇게 둔덕에서 멈춰 서나 싶던 빨강이는 스무스하게 그걸 넘어서더니 그대로 하천에 추락해 버렸다. 소위 깡통 옵션이었던 내 투스카니에는 지금은 기본으로 장착된 DAB(Driver Air Bag) 부품이 옵션이던 시절이라 추락하면서도 나를 지탱해 준 안전장치는 오로지 안전벨트 하나뿐이었다. 둔덕과 충돌하며 많은 에너지를 흡수한 덕에 하천에 추락해서도 정신을 잃거나 다친 곳은 없었다.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급하게 둔덕 위로 올라와서 내 차를 살폈다. 나는 생존해 있으니 좀 도와달라는 뜻으로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는데 그 사람들은
“야~ 살아있다! 가자 가자!”
하곤 정말 모두 가버렸다.
하는 수없이 기울어진 차에서 어렵게 내려 하천의 살얼음을 조심스레 딛고 약 5m가량의 눈 덮인 둔덕을 암벽등반하듯 올라와 보험사에 사고 접수를 했다. 나의 빨간 애마가 아직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턱이 망가진 듯 구겨지고 깨진 범퍼 때문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차를 인양하기 위한 크레인과 레카차까지 불러 적잖은 현금을 지불했고 인근 공업사에 맡겨진 차량 수리비 견적은 육백만 원을 상회했다. 차 값이 천만 원이었고 비싼 보험료를 아껴보겠다며 자기 차량손해 담보를 설정하지 않은 상태라 그냥 폐차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저 사지 멀쩡히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했지만 사고 전 가득 주유해 둔 것부터 할부금도 상환하지 못한 빨강이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열심히 번 돈이 허무하게 사라진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다소 억울한 마음도 있어 국가배상도 신청해 봤지만 기각당했다.
사고 수습 후 파트장에게 전화 보고를 하고 가까스로 8시 조회 시간에 늦지 않게 들어와 아직도 쿵쾅대는 우심방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책임들은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이 서로 자기의 용건만 들이밀었다. 업무 중에도 사고 소식에 더 놀란듯한 아빠의 전화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든 순간에도 사무실 사람들은 알 바 아니라는 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다.
보직자들은 말할 것 없이 상대적으로 책임연구원으로서 일하기 참 편했던 시절이다. 팀 내 업무분장이 명확히 구분돼 있음에도 현장 기술직이나 다른 팀 업무 영역까지도 연구원에게 짐을 지우면 어떻게든 해결해 오는 분위기다 보니 이들을 압박하는 것이 신속하게 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부품이 없어도 내 일, 조립하다가 부품이 파손돼도 내 일, 설계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내가 알아보고 원인 분석과 대책 수립 여부까지 확인하는 것도 내 일처럼 해야 했다. 자재와 물류 업무 담당자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관련한 협력사 방문자 출입 승인을 위한 결재나 인솔은 물론 설계나 구매본부에서 출입을 요청한 이들까지도 내가 대응하다 보니 휴대 전화기는 쉴 틈이 없이 울렸고 내 손님이 아닌 다른 손님들을 대응하느라 하루에도 숱하게 로비와 현장을 오르내렸다.
책임연구원들이 요청해서 이미 제출 완료한 자료도 유관 부문이 뭔가를 바꾸거나 양식이 변경되었다는 이유로 네댓 번 수정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다시피 재작성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전까지는 보직자나 소수 책임연구원들이 하던 사업계획 수립과 부회장 보고자료도 슬금슬금 연구원들에게도 들이밀더니 어느새 의무가 되어 독촉 메일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표준은 있지만 항상 예외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어느 정도까지 예외를 허용할지에 대한 최소한의 선도 없다. 그저 연구원들에게 지시라는 이름으로 들이밀면 불만이 있더라도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해낼 뿐이다.
내가 대응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일들을 들이밀 때면 순간적으로 노기를 띠긴 했지만 팀 연구원들 모두가 그렇게 사니까 참고 쳐냈다. 속에 불만이 쌓이는 만큼 내부 고객들이 원하는 아웃풋을 더 빨리 쥐여주고 정시 퇴근만을 노렸다. 회식이나 야유회도 종전과 크게 다를 것 없이 진행됐다. 많이 불참하긴 했지만 그 많은 행사를 다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회식을 제일 싫어하는 애’ 정도의 스탠스로 불성실하게나마 자리를 지킬 때도 있었다.
소속 센터에서는 지정된 교회에서의 봉사활동도 팀별 순번을 정해 의무적으로 참석토록 했다. 누구를 위하며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알 길은 없었고 단순히 보고용으로 사진 몇 컷을 담기 위한 주말 행사로 비쳤다. 봉사한다는 마음은 전무한 채 오전 네 시간 동안 그리 티도 안 나는 교회 외부를 정리해 주고 작은 파트 회식을 하듯 점심 식사까지 마친 후 돌아오니 소중한 휴일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팀에는 연구직보다 현장 기술직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팀장과 파트장은 이들의 모든 경조사에도 연구원들이 참여토록 했고 불참한 사람에겐 결재 문서의 font부터 세세한 내용을 트집 잡아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경조사는 정말 친분이 있는 사이에서 진심 어린 축하와 위로를 전하는데 의미가 있을 텐데 이곳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회사 특성상 부울경 쪽에 연고를 둔 팀원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경조사에는 굳이 조까지 편성해 참석토록 했고 특히 조사의 경우 두 명씩 순번을 정해 현업을 뒤로하고 장제지원에 동원되어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 불합리하다는 뜻을 비친 용감한 연구원이 있었는데 마음은 같았으나 그에게 힘을 실어주지 못해 후회되고 몹시 미안함이 남았다.
단 한 번 대화가 없던 현장 기술직의 일면식 없는 자녀 결혼식이 울산에서 예정됐고 내가 포함된 조의 차례가 되어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버스를 대절하여 오전 일찍 출발했음에도 수원역으로 돌아왔을 땐 밤 11시가 지나 간신히 귀가했던 주말도 기억에 남는다.
회사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도 나의 인생 제1의 목적인 결혼을 향해 쉼 없이 꿈틀댔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몇몇 이성과의 약속이 폐차를 하고 나서 잡혔는데 하필 멀리 거주하는 이들만 기회가 닿아 사람들로 가득했던 대중교통에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왕래해서 그런지 좋은 관계에 이르지 못했다.
집에서는 여전히 아빠와 엄마가 금전문제로 다퉜지만 엄마의 태도나 행동의 변화는 없었고 몸이라도 팔아서 생계에 보태라며 마음에 없는 아빠의 폭언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아빠의 답답한 마음은 십분 이해됐으나 이제는 남은 애정마저 모두 사라진 사람처럼 내지른 막말들이 선을 넘는 경우가 잦았다. 이젠 그 꼴을 일 분만 봐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빨리 누군가를 만나 남들처럼 결혼해서 독립함으로써 이곳으로부터 탈출하기만을 간절히 원했다.
간절할수록 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노력한다고 될 일은 아닌데 주변 친척들이나 지인들은 그만 재고 빨리 장가가라는 말을 참을 수 없이 가볍게 한다. 자기 때에는 다 없이 시작했다며 서둘러 결혼하는 것이 곧 효도라고도 했다. 자신의 딸 같으면 모아둔 재산 없이 빚만 사천만 원 있는 자와 결혼하는 것에 흔쾌히 찬성할 것인지 반문하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편하게 꿈틀대기 위해 새롭게 차를 구매했다. 여윳돈이 있어서도 아니고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계속 없는 법이니 덜컥 계약금을 넣었다. 현대 벨로스터라는 비인기 차량을 골랐고 당시 닿을 듯 절대 닿지 않던 소저에게 자문을 구해 색상은 블랙으로 정했다. 무이자 할부에 카드 포인트까지 탈탈 털어 장만한 이천만 원 상당의 차량은 곧 내 전 재산이었다.
차량을 인도받은 날 비닐도 뜯지 않은 채로 고등·대학 동창이자 같은 팀에서 일을 하는 N 연구원과 그와 결혼을 앞둔 처자를 태우고 시험 삼아 주행을 해봤다. 얼마 후 이들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N 연구원에게 웨딩카를 제공하기로 한 친구가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자 나의 모든 것이었던 깜장 애마를 차선책으로 투입했다. 식을 마칠 때까지 급하게 꽃과 리본을 둘러 웨딩카의 구색을 갖추고는 그들의 첫 보금자리인 송내동 낡은 빌라까지 신혼부부를 모셔주었다. N 연구원은 죽는 날까지 이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건 전혀 관심이 없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어떠한 액션도 전무한 채 살았다. 나보다 더 힘겨운 이들도 많고 어찌 보면 부모의 채무를 뜻하지 않게 물려받은 이가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도 억대 빚도 아닌 사천만 원에 불과하여 그리 낙담하며 무기력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았을 삼십 대 초반의 나에게 할 수만 있다면 별것 아니니까 기운 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단지 누군가를 만나 가득한 불안감을 떨쳐내고자 하는데 혈안 돼 닫히고 얼어붙은 마음으로 세상을 좀 더 넓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