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데우는 죽 한 그릇
맥없이.. 입맛 없던 어느 봄날,
기운을 좀 내보자며 소고기 영양죽을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노란 냄비 앞에 조용히 앉아 있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도 이래야 하는 거 아닐까?" 보글보글 새 하얀 문장이 쏙닥 쏙닥 놀고 있는 듯하다.
한 번에 쏟아낸 글은 왠지 설익은 땡감처럼 밥알도 톡톡, 텁텁한 떫은맛이 오래간다.”
속 쌀알은 여전히 딱딱하고 겉만 뜨겁게 달궈져 그대로 새까맣게 타 버린다.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부여잡고, 잠깐 스치기엔 너무 빠르고 무겁다.
그러나 기다림이 있는 죽은 다르다.
서서히, 오래 끓인다. 불을 줄이고 자주 저어가며 작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글도 그렇다. 천천히 데워야, 누군가의 마음에 살랑살랑 따뜻하게 닿는다.
세종의 글쓰기 루틴은 ‘죽’이었다
세종대왕은 병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이다.
그의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천재성? 리더십? 학자나 스승과 같은 고결한 성품?
아니다. 그 숨겨진 비밀은 죽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국정 업무를 시작하기 전,
꼭 약재 넣은 쌀죽을 한 그릇 먹었다.
더덕, 황기, 인삼이 어우러진 ‘약죽’.
소화도 잘 되고, 혈색도 도우며, 말을 잘하게 해주는 죽.
“훈민정음 창제 등 그의 위대한 업적은 소박한 죽 한 그릇에서 시작됐다.”
정승들의 현란한 말의 껍질을 벗기고 마음의 살결로 써 내려간 글.
그것이 백성의 속을 천천히 데워주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애민의 국본이었다.
정조의 '죽' 편지
정조대왕은 밤새 책을 읽고 시를 짓던 다정한 문장가였다.
그의 최애는 바로 율무죽.
몸을 맑게 하고 체력을 보충해 주는 완벽한 글쓰기 보조식이었다.
하루는 정책 논의 중 답이 늦은 신하에게는 말 대신 죽을 보냈다.
“속부터 달래시오. 그리고 책(글)은 그다음입니다.”
들깨죽 한 그릇, 마음을 녹이는 위로와 격려.
어느 날 정약용이 답장을 미루자, 이렇게 쪽지를 보냈다.
“글이 늦어 배고플까 염려되어 죽 보냄. 다음엔 죽 말고 죽비 보낼 것임.”
죽비는 농담, 죽은 진심이었다.
글이란 결국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따뜻한 배려임을 그는 알았다.
정약용, '죽' 끓이며 글을 살리다
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용은 매일 들보리죽을 끓였다.
쌀도 마음도 바닥났던 그 고달픈 시절,
그는 포기하지 않고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묵묵히 집필했다.
어느 날, 글문이 막혀 고개를 떨군 제자에게 말했다.
“죽은 말이 없지. 하지만 오래 끓일수록 깊은 맛이 난다. 사람도 그렇고, 글도 그렇네.”
그날 제자는 눈물 젖은 글을 처음 써보았고,
그 글은 훗날 법은 누구의 편인가를 묻게 한 ‘백성을 위한 법-흠흠신서’가 되었다.
'죽'처럼 글도, 천천히 끓여 보자
요즘 죽은 웰빙 시대의 슈퍼푸드다.
수험생의 야식, 아기의 이유식, 환자들의 생명식, 다이어트용 별식으로 다양하게 진화했다.
더 부드럽고, 더 영양가 있고, 더 따뜻하다.
글도 마찬가지다.
속도보다 깊이, 기술보다 정성, 유행보다 진심이 중요하다.
한 줄 문장이라도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게.
노자도 '죽'을 추천했다?
도덕경의 노자는 말한다.
“큰 그릇은 늦게 완성된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노자는 고기를 좋아했지만, 글엔 맹물의 순수한 맛을 권했다. “너무 자극적이면 탈이 나네. 죽처럼 끓여야 사람 마음에도 잘 받지.”
이 농담 같은 조언, 묵은장처럼 오래 남는다.
오늘 당신의 글은 어떤가요?
글이 안 써질 땐 억지로 단어를 꾹꾹 짜내지 말자. 그저 물을 붓고, 조용히 기다려보자.
뜨거운 불 앞에 불멍으로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단어가 스며들고, 문장이 부드러워진다.
그날 밤, 나는 글이 도무지 써지지 않아 한참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는 이미 다 썼다고 생각한 글이었는데,
어디 한 줄 마음에 드는 문장이 없었다. 머리는 뜨겁고 속은 헛헛했다.
그때 아내가 조심스레 내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호박죽 한 그릇. 노랗고 달콤한 냄새가 퍼지더니, 묘하게 마음도 풀렸다.
“당신, 오늘은 그냥 노랗게 따뜻해지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이 시큰해졌다. 위장이 아니라 속 마음이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평소 같으면 절대 쓰지 않았을 고백 같은 문장을 한 줄 써 내려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의 하루가 너무 고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 문장은 그렇게 쓰였고, 그 글은 예상치 않게 독자의 공감을 얻었다. 누군가는 그 글 아래 댓글을 달았다.
“이 글 한 줄 때문에 오늘도 힘내고 버티며 웃을 수 있었네요.”
그때 알았다. 누군가의 뜨거운 마음을 데워주는 그 한 문장이야말로 진짜 대박이라는 걸. 잘 끓인 죽 한 그릇처럼, 잘 익은 글 한 줄이 그렇게 세상 어딘가의 마음을 살려낸다.
그러니, 글이 안 써질 땐 억지로 쥐어짜지 말자. 냄비에 물부터 붓고 천천히 끓이자.
조급한 라면보다, 오래 고아낸 죽 같은 문장이 결국은 누군가를 위로한다.
당신이 오늘 쓴 글 한 줄이, 언젠가 누군가의 속을 덥히고 마음을 살리는 ‘죽 한 그릇’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천천히 문장을 끓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한 그릇, 당신 앞에 조용히 내밀어 본다.
글쓰기는 결국,
누군가의 마음을 데워주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 된다.
오늘 당신이 쓰는 한 줄,
누군가의 속을 편하게 해주는
따끈한 위로가 되길.
글쓰기 대박 사건의 비밀은
죽처럼 천천히, 오래 끓이는 정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