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대박 사건(6)

탄광촌 아이들의 놀이문화다

by 오엔디

《조선 후기 세 번의 호란과 이순신 장군의 기록 정신, 을지문덕과 강감찬의 시와 말 등은 글쓰기의 중요함을 다시 일깨워 준다.》


어릴 적 내 놀이터는 탄광 주변이었다.

학교 뒤편 숲을 지나면 늘 새까만 개울이 있었다. 눈에 보이기엔 맑았지만, 그 속은 검었다.

그건 곧 내 마음이기도 했다. 순한 마음 위로 새카만 현실이 내려앉았던 날들.


겨울이면 칡을 캐고, 봄이면 쑥을 뜯고,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아 끓인 어죽 국수.

가을엔 수수깡과 알밤이 간식이었다. 누구도 풍요롭지 않았지만, 모두가 행복을 만들어가던 소박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한겨울에 추위를 이기려 불을 피웠고, 그 속에서 눈에 띈 다섯 잎. 산삼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분명하게 보았던 그 자리는 텅 비었다.

기억은 또렷한데, 산삼의 자리는 사라졌다.

그날 나는 알았다. 산삼이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듯, 세상도 언제든 선물 같지는 않다는 것을.


그러나 글쓰기는 달랐다.

우리가 가진 단 하나의 새하얀 종이, 그리고 그위의 까만 연필 한 자루.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찾아 넣을 수 있었다.

산삼도, 어죽 국수도, 그리운 자장면의 추억도.


조선 후기, 세 번의 호란(정묘호란,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으로

나라가 무너지고,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던 그 치욕의 시간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말(武)로는 패했지만, 기록(文)은 살아남았다.


김상헌의 『남한산성일기』에는 “패배한 자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절규가 담겨 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청백리들의 이름도,

굴욕 속에서도 자존심을 지키려던 백성들의 이야기들도 모두 기록으로 남았다.

삼전도의 치욕 이후에도 우리는 글을 남겼고,

그 글이 곧 후대의 호국정신이 되었다.


탄광촌 아이들도 그랬다.

자장면 한 그릇이 없어도, 통닭 한 조각조차 없어도, 우리는 저마다의 소소한 행복 이야기를 썼다.

기억 속 검은 개울을 맑게 해주는 건, 결국 말과 글이었다.

누군가는 고장 난 리어카를 보고 철학을 썼고,

누군가는 산에 오르며 새까만 시를 썼다.


글쓰기는 그저 표현의 도구가 아니었다.

글은 생존이고, 놀이고, 사치 없는 위로였다.

그때 그 아이들의 까만 손안에 흙 묻은 수수깡 대신 연필을 들게 했다면,

지금쯤 어디선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 앞에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은 한 사람,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기록을.

1598년 11월 19일, 노량 해전.

적의 총탄이 몸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이순신은 조용히 외쳤야 했다.

“싸움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충무공의 『난중일기』 마지막 문장으로 남았다.

그는 죽었지만, 그 글은 영원히 살아남았다.

그의 전쟁은 끝났지만, 그 기록은 지금도 호국으로 읽힌다.


을지문덕은 백만 대군에게 시 한 편을 보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만의 병사가 남아 있습니다.” 같은 외침이 아니었다.

그는 이문(以文)으로 무를 꺾었다.

그 시를 읽은 수나라 장수 우중문은 휘청였고, 결국 후퇴했다.

시 한 줄의 병법은 그 어느 것보다 강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의 승리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백성의 고생과 희생이 너무 크다”는 말로 군가에 백성의 이름을 넣었고, 그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전쟁은 단순한 무용담이 아니라 민생의 역사적 승리였다.


검은 개울을 건넌 나도,

세 번의 침략을 견뎌 낸 조선도,

시 한 편으로 백만 대군을 물린 을지문덕도,

백성의 이름으로 전장을 누빈 강감찬도,

죽음 앞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이순신도—


그들은 결국, 글로 영원히 살아남았다.


을지문덕이 시를 쓴 날, 적장의 칼은 멈췄고,

강감찬이 승전을 기록한 날, 백성의 이름은 역사에 새겨졌으며,

이순신이 마지막 한 줄을 남긴 날, 우리는 불멸의 정신을 얻었다.


그런 희생과 고귀한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기억했을까.

검은 연기에 휩싸인 전장의 함성 속, 그들이 남긴 것은 단지 승리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말’이 아닌 ‘문장’으로 살아남았다.

그 문장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탄광 개울가에서 손을 덜덜 떨며 연탄을 주우면서도

어쩌면 언젠가 이런 삶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 믿음 하나가 내 마음을 지탱했다.

그날 불 속에서 놓쳐버린 산삼처럼, 삶은 늘 아쉽고 모자라지만,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때보다 더 단단해졌다.


당신도 그렇다.

말 못 할 상처가 있다면 그냥 아무거나 써보라.

지워지고 잊힌 기억이 있다면 그대로 적어보라.

글쓰기는 그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그 기억에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글쓰기는 칼보다 강하고, 총보다 멀리 날아간다.

전쟁으로 무너진 시대 속에서도, 잊힌 골목 속에서도, 죽음이 멈추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것이 글이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식이다.

그것이 오늘의 대박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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