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천을 미룬 이무기다
사람들은 자꾸 묻는다.
“너 아직도 거기 있어?”
“그거, 계속할 수는 있는 거야?”
“언제쯤… 되는 건데? 답답하네.”
그럴 때마다 나는 한 박자 쉬고, 이렇게 답한다.
“나는 아직 승천을 미룬 이무기야.”
이무기란 존재는 참 애매하다.
거대한 뱀처럼 생겼지만, 그 속엔 늘 파란 하늘을 품고 산다.
수천 년을 수련한 끝에 하늘로 승천하면 용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설에서
그 마지막 순간에 돌멩이 하나에 맞고 실패하여 지상으로 떨어진다.
지나가던 농부가 무심코 던진 그 조약돌 하나,
그 한 방에 몇 천 년이 무너진다.
그래서 이무기는 무서운 괴물이 아니라,
‘거의 다 왔는데 아주 조금 부족한 존재’로
어쨌든 친근한 존재다.
그게 나였고,
그게 지금 글을 쓰는 당신이기도 하다.
글을 쓰다 보면 이무기가 되는 날이 있다.
문장은 자꾸 꼬이고, 의미는 어디로 사라지고,
이걸 왜 쓰고 있는 건지,
누가 읽어주긴 하는 건지
답이 없는 질문만 늘어놓는다.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쓴다.
왜냐하면, 이무기의 비늘은 갈고닦고 쓰지 않으면 결코 자라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무기의 진짜 비극은 돌멩이가 아니다.
진짜 무서운 건
돌에 맞아 땅에 쓰러졌을 때,
‘에이 그냥 뱀으로 살까?’ 하고
스스로 땅에 누워 포기하는 마음이다.
그 순간, 이무기는 더 이상 이무기가 아니다.
그저 대로변 큰 거리의 큰 뱀일 뿐이다.
용이 되지 못한 건 결코 실패가 아니다.
다시 노력하면 될 수 있었던 걸, 스스로 포기하는 게 진짜 비극이다.
한때 조선의 선조는, 나라의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자책하며 "나는 부덕한 군주다"라고 했다.
임진왜란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세월 동안 그는 용이 되지 못한 채, 그저 백성만 바라보며 눈물만을 삼켜야 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이무기라 여긴 군주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무기의 슬픔 속에서도,
세상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던 뚝심은
후대에 정조라는 찬란한 용으로 이어진다.
정조는 달랐다. 아니,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짊어진 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라를 다시 세우려 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던 어린 시절,
벼슬길에조차 의심과 감시가 가득했지만
그는 학문으로, 글로, 정책으로 스스로를 증명해 냈다.
정조 또한 이무기였으나, 마침내 스스로 승천한 용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끝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들의 고통을
잊지 않았기에 더 단단한 통치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승천을 잠시 미룬 이무기는 어디에 든 지 있기 마련이다.
이미 조건은 다 갖췄는데,
지금은 하늘보다 여기를 더 지켜야 한다고,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위해
아직 땅에 남아 있는 존재들.
그건 ‘실패한 존재’가 아니다.
성장의 타이밍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아는 존재,
강해질 때까지 자신을 아끼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승천한 용’도 나름의 성공한 점에서 멋지지만,
승천을 미룬 이무기는 더 깊이가 있어 멋지다.
용은 실제로 하늘을 날지만,
이무기는 계속 하늘을 바라본다.
그 눈빛이, 그 방향이,
이미 승천한 용의 자격이 된다.
글을 쓴다는 건
매일 한 줄씩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과 같다.
그 끝에 날개가 없어도,
비늘이 아무리 거칠어도,
구름을 다 못 모았어도,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보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아직도 승천을 미룬 이무기다.
하늘을 훨훨 나는 용은 아니고,
내 글은 아직도 작고 서툴지만—
그래서,
나는 더욱 강한 존재가 될 것이다.
한 번의 돌멩이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큰 구름을 모으는 존재.
끝까지 하늘의 승천을 포기하지 않는 존재.
그러니 지금도 부끄럽지 않다.
나는 아직 행복한 이무기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문장의 힘도
하늘을 쿵—하고 건드릴 때가 올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