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밥상머리에서 그 끝은 무한 상상력이다
“오늘은 선생님께 무슨 질문을 했니?”
유대인의 하루는 이 한 문장으로 시작된다고 한다. 질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해야 한다는 철학적 인내심. 그들의 일상은 질문으로 깨어나고, 삶은 끊임없는 궁금증으로 자라난다.
아침 식탁은 허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다. 그 위에는 오늘의 질문이 한 상 멋지게 차려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아버지의 한마디에 아이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 눈동자 속엔 엉뚱한 상상도, 우주의 비밀도, 세상을 바꾸는 결론도 깃든다.
부모는 아이의 말에 조용히 웃고, 따뜻한 말 한 줄을 얹는다. “넌 정말 남다른 생각을 가졌구나.”
그 격려 한마디가 아이를 세상의 중심으로 데려다준다.
질문이 바뀌면 아이가 바뀐다. 아이의 잠든 사고력과 무한 잠재력을 깨우는 "어떻게 질문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정답만 찾는 질문보다 생각을 움직이는 질문.
"왜? 그렇게 생각했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혹시 다른 방법이 있다면 뭐가 괜찮을까?" 이것은 단순히 아이의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질문은 아이의 생각을 '움직이게' 하기 위함이다.
질문은 사고의 방향을 바꾸고, 감정을 들여다보며, 때로는 아이의 행동까지 변화시킨다. 유대인의 교육, 질문하는 문화가 숨어 있다.
유대인은 아주 어려서부터 "왜?', "정말 그럴까?",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와 같은 질문 훈련을 받는다.
하버드대 진학을 앞두고 인터뷰를 한 유대인 학생이 "인터뷰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유대인 가정의 대화 수준이 매우 높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쉼 없이 던지는 질문, 깊이 있게 경청하는 태도, 아낌없이 건네는 칭찬.
이 모든 것이 유대 교육 5천 년의 뿌리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보다 더 따뜻하고, 더 촘촘한 교육의 현장.
바로 밥상머리다.
“할아버지는 전쟁을 어떻게 견디셨어요?”
“엄마, 아빠는 어릴 적 무슨 꿈을 꾸었어요?”
“왜 우리 집엔 이 가훈이 있는 거예요?”
이런 질문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다.
된장국이 보글보글 끓는 사이,
김치와 계란말이 사이로 툭 던져진 말속에
한 가정의 역사와 철학이 숨어 있었다.
접시에 담긴 정성은 곧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아이에게 삶을 살아갈 방향이 되었다.
그러나 요즘 밥상은 조용하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부모는 짧은 메시지로 하루를 정리한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메말라가고,
경쟁은 치열하지만 공감은 사라진다.
우리는 지금, 머리만 자란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그 아이들은 넓은 바다의 깊이를 모른 채
얕은 물가만 떠도는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제 ‘글쓰기’가 대박 사건이 되어야 한다. 글쓰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되찾는 기술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가족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가?”, “이 길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글쓰기는 침묵했던 가정의 목소리를 되살리고,
잊힌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밥상머리에서 시작된 큰 어른들
조선의 큰 어른들,
그들의 뿌리도 책상이 아닌 밥상머리였다.
조광조는 아버지와 나눈 성리학 문답에서
권력보다 도덕을, 이익보다 정의를 배웠다.
황희 정승은 말했다.
“내 정치의 뿌리는 어머니의 밥상머리였다.”
그는 매 끼니마다 들려주던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공평함과 이치를 터득했다.
성삼문과 신숙주,
그들의 밥상 위엔 『시경』과 『서경』이 놓였다.
같은 시작, 다른 결말. 성삼문은 충절을 택했고, 신숙주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다 밥상머리에서 스스로의 길을 배웠다.
율곡 이이는 여덟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과 『소학』을 읽었다. 그의 글에는 언제나 깊이가 있었고, 그 깊이는 어머니의 눈빛에서 비롯되었다.
퇴계 이황은 노모 앞에 절을 올리고 책을 펼쳤다. 그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책을 읽는 건 남보다 잘나기 위함이 아니라,
네 마음을 닦기 위한 거란다.”
그 한마디가 ‘격물치지’, 세상을 닦는 철학이 되었다.
세종은 어린 시절, 어머니 원경왕후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전날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어느 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아는 것을 사람답게 쓰는 거란다.”
그 말 한 줄이 씨앗이 되어,
훈민정음이라는 위대한 꽃을 피웠다.
글이, 말이, 결국 세상을 바꿨다.
《채근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집안이 화목하면 온갖 복이 스스로 따르고,
가정의 자녀가 총명하면 백 세대가 흥성한다.”
복이 따르는 집안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잘 묻고, 잘 듣고, 잘 기록하는 태도.
그것이 집안의 품격이다.
세상을 바꾸는 말은 언제나 밥상머리에서 시작되었다.
이제 한 아이가 글을 쓴다.
할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고,
엄마에게 들은 꿈을 옮긴다.
그건 단지 글이 아니다.
그건 가문의 기억이고, 민족의 뿌리이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힘이다.
글쓰기는 밥상머리 교육의 회복이다.
그 시작은 거창할 필요 없다.
오늘 저녁, 아이에게
단 한마디면 충분하다.
“오늘은 뭐가 그렇게 궁금했니?”
질문은 사고를 열고, 상상력을 키우고, 새로운 관계를 살린다. 정답을 주기보다 스스로 답을 찾아 무한 상상력과 가능성을 심어주자. 그 안의 생각을 움직이는 무한 잠재력을 깨워주자.
그 질문 하나가
아이의 눈에 세상을 비추고,
한 가정을 일으키며,
언젠가 한 민족의 미래를 다시 쓰게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