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사랑은 손을 잡는 일보다 먼저, “너의 이름은 뭐니?”라고 묻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저 이름 하나를 부르는 일. 그러나 그 사소한 행위 속에 놀라운 변화가 깃들어 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건 존재를 기억하겠다는 약속이자, 잊히지 않게 품겠다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 없는 존재는 쉽게 잊힌다
예전에 산에 오르면 그저 정상만 바라보았다.
그저 몇 미터를 더 오르는 일, 일상의 하루 고도를 더 올리는 일, 그게 산행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산길 옆 야생화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 작고 연약한 존재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예쁘다… 그런데 넌 누구니?" 그 순간부터였다. 식물도감도 찾아보고, 주위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그 한 송이 꽃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며칠을 끙끙 앓기도 했다. 그렇게 수학의 난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꽃의 이름이 ‘산괴불주머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깡충깡충 토끼처럼 놀랍도록 기뻤다.
그 이름을 알게 되자, 그 꽃은 다시 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이름을 알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이었지만, 이제는 그저 그런 꽃이 아닌 ‘나의 꽃’이 된 것이다.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는 말한다
“이름은 생명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그는 서울 근교 숲길을 걸으며 시민들에게 물었다. “이 나무, 이름 아세요?” 대부분은 이렇게 답했다. “그냥 저기 무엇이냐? 나무죠 뭐.”
그러자 신 박사는 차분히 설명했다. “이건 산벚나무입니다. 봄이면 눈처럼 꽃비를 뿌리고, 가을이면 붉게 물들어요. 나무껍질은 얇고,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도 나지요.” 그는 그렇게 이름을 통해 존재의 고유함을 알려주었다.
단풍나무, 소나무로만 통칭되던 숲의 세계가
그 순간부터 색감과 결을 가진 각각의 개체로 살아났다. 이름을 불러주는 건, 어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이 꽃이든 나무든, 새든, 혹은 사람이어도 말이다.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의 새 사랑법
우리가 ‘새 박사’로 기억하는 윤무부 교수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새는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울타리 너머로 들려오던 ‘뻐꾸기’의 울음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고, 그 슬픈 노랫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새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그게 평생의 일이 되었다. 윤 교수는 새를 단순한 분류로 보지 않았다. 그 새가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고, 어떨 땐 수줍고, 어떨 땐 화려하게 구애하고, 어떤 새는 이별이 잦고, 어떤 새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이름을 알면 생명을 존중하게 됩니다. 존중은 사랑의 시작이에요.” 그의 말에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겸허함이 배어 있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랑하는 일이다
사람도, 새도, 꽃도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저 ‘그 사람’, ‘그 새’, ‘그 꽃’으로 금세 잊히고 만다. “그 뭐지, 저번에 봤던… 예쁜 거 있잖아”
이런 말은 존재를 스쳐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는 나의 세계로 들어온다. 그리고 ‘하나의 꽃’이 된다.
다시는 쉽게 잊히지 않을 이름으로 남는다.
글쓰기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건 내 마음 안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어떤 감정, 잊고 싶었지만 잊히지 않는 한 사람, 묘하게 반복되던 장면에게 그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다.
슬픔이었던 것에 ‘그리움’이라 이름 붙이고, 무심코 흘린 눈물을 ‘사랑’이라 써 내려가고, 한없이 떨렸던 가슴이 순간을 ‘설렘’이라 고백하는 일. 누군가에게 이름을 부르는 다가감이다.
글을 쓴다는 건 그 무수한 존재들에게
“너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꽃이었다”라고 말해주는 일이다. 그 순간, 삶은 기록이 되고, 기억은 노래가 되고, 그렇게 당신의 문장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당신의 글은 누군가에게 꽃이 된다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시를 맺는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글쓰기가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 이름을 통해 한 존재의 빛을 밝혀주는 일. 그 이름을 통해 나의 감정을, 당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다시 피워내는 일.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 덕분에 여기까지 행복해져 왔다. 그리고 오늘, 당신이 써 내려간 그 한 문장이 누군가의 마음에 오래 남아 다시 피어나는 꽃이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글쓰기라는 대박 사건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