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쓴다(9)

제9화 불 꺼진 창밖, 꼬깃꼬깃한 첫사랑 편지다

by 오엔디

밤이 깊어 갈수록, 점차 도시의 불빛은 아득히 멀어지며 더 조용해진다. 아파트 단지 등 불빛이 하나둘 꺼지면, 세상은 잠시 평화가 찾아온 듯, 모두가 잠든 듯 한동안 안개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불 꺼진 창 너머에도 누군가는 깨어 있다.

설거지 물기를 닦는 손, 내일을 걱정하는 송글 땀이 맺힌 이마 주름, 훌쩍 울음을 삼킨 눈.


불은 껐지만, 마음은 여전히 켜져 있는 그 도심의 쓸쓸한 사람들.

그러나 말없이, 단단하게 하루를 마무리하며 내일의 작은 꿈을 지닌 사람들.


공자는 말했다.

“말이 적고 뜻이 깊은 자는 반드시 덕이 있다”

노자는, 또 이렇게 적었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大音希聲),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大象無形).”

말이 줄어들수록, 문장이 비어 있을수록

그 안의 감정은 더 깊게 스며든다.


글도 성인의 가르침에 비유된다.

아무 수식 없이 조용히 내려앉는 문장 하나가,

오래도록 기억과 마음 속에 천천히 잠긴다.


그런 침묵의 시간들을 견뎌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진실함이요, 잔잔한 새벽 아침에 담긴 하얀 초승달 같은 그런 문장이다.


한밤의 버스 창가 사이로,

불 꺼진 창에 커튼 하나가 살짝 흔들리는 걸 보며 문득 생각한다.

‘아, 저 안에도 누군가 있구나.’

그걸 알아채는 순간, 하루의 불 꺼진 비밀 이야기는 시작된다.



나는 그 조용한 밤을 향해 쓴다.

그리고 또 하나,

글을 쓰는 마음엔 늘 첫사랑 같은 감정이 있다.


서랍 깊숙한 어딘가에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꼬깃꼬깃한 편지 한 장.

삐뚤어진 글씨, 어색한 표현과 수줍은 문장. 그렇지만 그 속엔 작은 울림의 진심이 있다.


글쓰기는, 어쩌면 그 편지를 다시 쓰는 일이다.

말로는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을

한 문장씩 조심스럽게 꺼내는 일.


조금은 서툴고 , 때로는 수줍은 듯 창피하고,

그러나 누구보다 간절한.

그 간절함이 삶을 바꾼 작은 거인들이 있다.


배우 고명환은 사업 실패로 7억 원이 넘는 빚을 졌을 때, 절망 대신 고전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는 『고전이 답했다』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논어를 하루 한 줄씩 필사하며, 마음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 그 구절을 베껴 쓰며, 먼저 나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글을 쓰며, 자신을 다시 고쳐 썼다.

말하자면, 그는 무너진 삶 위에 필사라는 벽돌을 쌓았고, 그 벽돌이 하루하루 자기 자신을 회복시키는 언어의 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천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는 『맹자』의 문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고통조차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듯 고전한 줄, 그 생생한 필사한 줄이

그의 삶을 다시 붙들고 방향을 틀게 했듯,

글쓰기란 결국 삶의 진로를 수정하는 도구다.


사람은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라,

다시 쓰지 않을 때 진짜 무너짐으로 끝난다.


며칠 전, 내게 도착한 두 개의 메시지.

하나는 낯선 독자의 메일이었다.

“작가님, 저 암투병 중인데요. 밤마다 글을 읽으며 버팁니다. 창밖엔 아무 불빛도 없지만, 작가님 글은 제 마음에 환하게 불을 켜줘요.”


다른 하나는 오래전 직장 선배에게서 왔다.

“혹시 이 글… 네가 쓴 거 맞지? 요즘 은퇴를 앞두고 이것저것 복잡했는데, 이 글 보고… 좀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고맙다.”


이런 간절한 기다림의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이번에도 신영복 선생의 글쓰기와 사유를 생각했다.


그는 감옥이라는 불 꺼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세상과의 ‘관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 고독한 시간 속에서도 ‘함께 있음’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간절히 썼고, 스스로를 고쳐 쓰는 사유의 시간도 훌륭하게 견뎠다.

그가 병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하나는 이렇다. “사람은 관계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선생에게 있어 글쓰기란, ‘나’를 잘 쓰는 일이 아니라, ‘너와 나의 사이’를 조심스럽게 써 내려가는 관계의 하루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말했다.

“좋은 글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깊이 생각할 때 비로소 태어난다.”


나는 이제 조금씩 알아 간다.

우리가 조용히 써 내려가는 문장 하나, 그 안에 깃든 마음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작은 용기, 희망의 불빛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영복 선생은 “가장 높이 오른 사람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을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일매일 ‘나를 처음처럼 다시 써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내일도 쓸 것이다.

보이지 않는 창 안에서, 말없이 살아내는 그 마음을 향해.

누군가의 서랍 속에 오래 남을 꼬깃꼬깃한 편지 한 장처럼.


말이 없어도, 진심은 남는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제 다시, 나를 고쳐 쓰는 길이니까.


신영복 선생이 가장 아꼈던 단어, 가장 신중하게 쓴 한 문장. 처음처럼,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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