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자립이 불러온 영혼의 질식, 그리고 구원에 관하

"괜찮다"는 슬픈 거짓말: 우리는 서로의 외부 심장이다

by 슈펭 Super Peng

엘리베이터 속의 마네킹들


매일 아침 7시 30분,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1.5평 남짓한 직사각형의 밀실로 걸어 들어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침묵의 공간이 된다.


어제저녁 뉴스에서 본 끔찍한 사건 사고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이웃과 눈이 마주치는 일이다. 우리는 황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의미 없는 스크롤을 내리거나, 허공에서 바뀌는 붉은색 층수 표시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거울에 비친 뒷사람의 어깨가 축 처져 있어도, 누군가의 깊은 한숨 소리가 정적을 깨뜨려도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으로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사는 거지'라며 타인의 고통을 배경음처럼 흘려보낸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가장 잔인한 거짓말을 예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이 짧은 한마디는 타인에게 나의 약함을 들키지 않게 해주는 방패이자, 타인의 무거운 짐을 나눠 지지 않겠다는 거절의 의사표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다"는 주문을 걸며, 각자의 섬으로 고립되어 간다.


하지만 통계라는 이름의 성적표는 우리의 "괜찮음"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한국의 자살률은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 중이다. 10대 청소년부터 2030 청년, 그리고 사회의 가장 단단한 버팀목이라 믿었던 40대 가장들까지, 전 연령층에서 '자살'이 사망 원인 1위가 되었다. 특히 1983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으로 40대 사망 원인 1위가 암이 아닌 자살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사회가 보내는 비명과도 같다.


나는 이 참혹한 현상을 개인의 의지박약이나 우울증 탓으로 돌리는 시선에 단호히 반대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회적 타살'이다. 한 인간이 스스로 존재를 지우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우리 사회가 그를 철저히 방치하고 외면했기 때문에 벌어진 '집단적 방조'인 것이다.


K과장의 캡슐: 독은 어떻게 퍼지는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여기 평범한 직장인 K과장이 있다. 그는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가장이다. 회사에서는 "네, 알겠습니다"라며 웃으며 업무를 처리하고, 집에서는 피곤한 내색 없이 아이들과 놀아준다. 겉보기에 그는 완벽하게 '기능'하는 사회 구성원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깊은 곳,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지하실에는 '독이 든 캡슐'이 하나 놓여 있다. 그 캡슐 안에는 승진 누락에 대한 수치심, 치솟는 대출 금리에 대한 공포,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장의 중압감이 끈적한 액체처럼 고여 있다.


심리학자들은 자살 충동을 느끼는 상태를 이 캡슐이 깨진 상태에 비유한다. 어느 날, 아주 사소한 계기(상사의 비난이나 배우자의 한숨)로 캡슐에 금이 간다. 그러면 걷잡을 수 없는 독기 무기력, 자기 혐오, 절망가 쏟아져 나와 뇌를 잠식한다.


이때 벌어지는 뇌의 반응은 실로 끔찍하다.


첫째, 고립감(Loneliness)이 극대화된다. 물리적으로 가족과 함께 있어도, K과장은 마치 우주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공포를 느낀다.


둘째, 자기 부정(Self-loathing)이 시작된다. "내가 사라지면 보험금이라도 나오니 가족에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비이성적이고 왜곡된 논리가 그를 지배한다.


셋째, 무감각(Numbness)이 찾아온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다. 고통이 임계점을 넘으면 뇌는 생존을 위해 감각 스위치를 꺼버린다. 더 이상 슬픔도,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 '해리(Dissociation)' 상태.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점은, 독이 퍼져 마비된 K과장은 스스로 구조 요청을 보낼 힘조차 잃는다는 것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소리칠 수 있는 건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뿐이다. 정말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사람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그러니 "힘들면 말해"라는 우리의 위로는 얼마나 무책임한가. 진짜 힘든 사람은 말할 힘이 없다.


뇌과학이 밝혀낸 진실: 인간은 '개방형 고리'다


도대체 왜 우리는 혼자서 이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걸까? 왜 굳이 타인이 필요한 걸까? 이것은 감상의 영역이 아니라 생존의 과학이다.


토마스 루이스(Thomas Lewis)와 같은 정신의학자들은 인간의 신경계를 '개방형 고리(Open Loop)'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인간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체 리듬을 스스로 100% 조절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타인의 눈빛, 목소리, 체온이라는 외부 신호가 유입되어야만 비로소 호르몬 수치가 안정되고 뇌파가 진정되는 불완전한 존재다. 엄마가 아이를 안아주어야 아이의 심박수가 떨어지듯, 성인이 된 우리에게도 나의 불안을 진정시켜 줄 '외부의 존재'가 생물학적으로 필수적이다. 즉, 타인은 단순한 친구나 동료가 아니라, 나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외부 심장'이나 다름없다.


최근 '러닝 크루'나 '독서 모임'이 폭발적으로 인기를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혼자 뛰는 게 편하고, 혼자 책 읽는 게 효율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여든다.


함께 땀을 흘리고, 같은 문장을 읽으며 눈을 맞출 때, 우리 뇌의 보상 중추인 복측 선조체(Ventral Striatum)에서는 불꽃이 튀듯 도파민이 분비된다. 뇌가 외치는 것이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나는 연결되어 있다."


반대로 우리가 "괜찮다"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순간, 뇌는 이를 '비상사태'로 인식한다. 외부와의 연결이 끊긴 '닫힌 계(Closed System)'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은 배출되지 못하고 증폭되어 결국 시스템 전체를 파괴한다. 이것이 고독사가 발생하는 뇌과학적 메커니즘이다.


오지랖의 재정의: 거룩한 침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하나다. 서로의 '닫힌 계'를 억지로라도 열어야 한다. 나는 이것을 '건강한 오지랖' 혹은 '거룩한 침범'이라 부르고 싶다.


"개인주의"와 "사생활 존중"이 미덕이 된 사회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은 촌스럽고 무례한 일로 취급받는다. 혹시나 오해를 살까 봐, 혹시나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우리는 침묵을 택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거대한 가스실처럼 변해가는 지금, 그 점잖은 침묵은 미덕이 아니라 죄악에 가깝다.


독이 든 캡슐이 터져 마비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해독제는 타인의 개입뿐이다.


"오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힘들어 보이는데, 잠깐 커피 한잔할까?"


"너 괜찮지 않은 거 알아. 내가 옆에 있어 줄게."


이 투박하고 촌스러운 참견들이, 누군가의 뇌에 강력한 '소생 신호'를 보낸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 내 고통에 반응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뇌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당신의 오지랖이 캡슐에서 흘러나오는 독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물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너나 잘해"라는 냉소를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 하나를 살리는 일이다. 쪽팔림이나 어색함 따위가 생명보다 무거울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 '오지라퍼'가 되어 욕먹을 용기가 절실하다.


역설의 구원: 나를 완성하는 타인


이 글을 쓰며 나는 삶의 놀라운 역설(Paradox) 하나를 고백하려 한다.


나는 한때 우울의 깊은 늪에서 허우적거린 적이 있다.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누군가를 도우려 했을 때, 나는 살아갈 힘을 얻었다.


내 코가 석 자인데도 타인의 아픔이 눈에 밟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던 그 순간. "고맙다"는 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내 뇌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함이 차올랐다.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이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항우울제였다.


타인의 캡슐을 닫아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무기력의 캡슐마저 단단히 잠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관계가 주는 '이중 보상'이다.


이 책의 제목은 <오직 나만이 나를 완성해>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문장은 타인 없이는 결코 나를 완성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될 때, 비로소 온전한 '나'로 바로 설 수 있다.


그러니 부디, 오늘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혹은 사무실 복도에서 마주칠 누군가에게 조금 더 관심을 가지자. 조금 더 귀찮게 굴고, 조금 더 선을 넘자.


"괜찮아?"라는 껍데기 같은 질문 대신, "안 괜찮아 보여, 내가 뭘 도울까?"라고 물어보자.


당신의 그 작은 용기가 누군가의 오늘을 살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무너질 때, 당신이 살려낸 그 누군가가 당신의 내일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구원이다.


나다움은 '고립'이 아니라 '공명'이다

어떤 이들은 반문할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제목은 <오직 나만이 나를 완성해>인데, 왜 자꾸 타인을 신경 쓰라고 합니까? 진정한 나다움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찾아지는 것 아닙니까?"


맞다. 우리는 고독 속에서 사유하고 성장한다. 하지만 '나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 '관계'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거울이 없으면 내 얼굴을 볼 수 없듯, 타인이라는 거울이 없으면 우리는 내면의 윤곽을 온전히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과 벽을 쌓고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고, 부당한 침묵을 깰 용기를 내며, 내가 가진 온기로 누군가의 언 맘을 녹여줄 때 확인되는 '주체적인 생명력'이다.


우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눈을 피하지 않고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말을 건넬 때, 우리는 단순히 인사를 한 것이 아니다. 삭막한 사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나는 따뜻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스스로 증명해 낸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괜찮아?" 대신 "살아보자"고 손을 내밀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무기력한 부품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독이 든 캡슐을 닫아주는 행위는 타인을 위한 헌신인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자기 확인의 과정이다. 나다움은 고립이 아니라 공명(Resonance)이다. 나의 파동이 타인의 파동과 만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룰 때, 찌그러져 있던 나의 자존감도 제 모양을 찾는다.


그러니 두려워 말고 연결되자. 타인의 삶에 기꺼이 스며들자.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줄 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빛나기 때문이다.

오직 나만이 나를 완성한다. 하지만 그 완성의 여정은, 당신의 손을 잡는 그 순간 비로소 끝이 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외로운 열정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