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삶과 자아 상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관계 속에 놓입니다.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때로는 스쳐가는 인연들까지.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타인의 기대를 먼저 살피고 그에 맞추려 노력하곤 합니다. 특히 '싫다'는 솔직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억지로 미소 지으며 타인의 요구를 수용하는 순간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자신을 조금씩 잃어가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다양한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기주장성 부족(Lack of Assertiveness)입니다. 자신의 권리와 욕구를 존중하면서도 타인에게 명확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능력이 부족할 때 우리는 타인의 비난이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진실된 감정을 숨기게 됩니다. 이러한 행동은 단기적으로는 관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 내면에 심각한 균열을 가져옵니다.
사례1 직장인 김대리는 몸이 좋지 않아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날에도 상사의 회식 제안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불참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거나, 팀워크를 저해하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회식에 참석하는 순간, 김대리는 자신의 신체적 고통과 내면의 불일치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낍니다.
이는 정서 노동(Emotional Labor)으로 이어져 심한 피로감과 함께 정신적인 소진을 경험하게 합니다. 자신의 건강보다 타인의 시선을 우선시하는 행동이 반복되면서, 김대리의 자아 존중감(Self-Esteem)은 점차 낮아지고, '나는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기대에 맞춰야만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잘못된 인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친구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학생은 언제나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심지어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이라도 친구들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합니다. '착한 아이'로 불리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사회적 승인 욕구(Need for Social Approval)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의 갈등을 두려워하고 미움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심리는 결국 박학생의 진짜 모습을 억압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친구들에게 맞춰주는 행동을 하지만, 속으로는 불만과 스트레스가 쌓여 내적 불일치를 경험하게 되고, 이는 불안감이나 우울감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학생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자아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이청년은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현실적인 조언에 따라 꿈을 접고 안정적인 직장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기보다는 외부 환경이나 타인의 의견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외적 통제 소재(External Locus of Control)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청년은 타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자신의 진정한 열망을 억압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청년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Regret)와 함께,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자아 실현 방해의 고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타인의 기대에만 맞추려 하는 삶은 단순히 소극적인 성격을 넘어섭니다. 이는 건강한 자아를 잠식하고, 심리적 소진, 관계의 왜곡,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잃어버리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인식하고, 이를 존중하며 건강하게 표현하는 자기주장성은 단순한 자기 고집이 아니라, 건강한 자아를 유지하고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행사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는,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잡고, '진정한 나'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