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마라톤을 시작할 땐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달리다 보니 자세도 이상하고 달리는 건지 빨리 걷는 건지 빨리 걷기와 달리는 차이점도 몰랐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지역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나보다 먼저 뛴 선배들에게
“이렇게 뛰어라, 팔은 이렇게 해라, 호흡은 어떻게 해라”
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 해보려 해도 쉽지 않았다. 그 순간 알게 된 런 교실(달리기 수업), 그때 만난 나의 첫 마라톤 스승인 이선춘 코치님을 만나 자세부터 체크 받고 문제점들을 하나씩 개선해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록에 욕심도 없었고 뭔가 꾸준히 운동을 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나 자신이 뿌듯했기에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하지만 코치님은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셨다. 그에게 주어진 수식어 < 마라토너 선수출신의 국가대표 코치> 갑자기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조심스럽게 나의 마라톤 인터뷰 첫 주자가 되어주겠냐고 요청했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1. 언제부터 달리기를 시작하셨나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었어요. 시골에 있으면 뭐 하겠어요. 공부에 욕심이 없어서 뛰어다니고 많이 놀았어요. 초등학교 땐 축구를 좋아했었고 중학교 때 선생님 추천으로 서울지역 구청장배 육상대회를 출전했는데 운 좋게 3등 안에 들었어요. 그때부터 달리기를 해볼까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 진로를 정해야 할 고등학교시기에 인천체육고등학교를 입학을 했어요. 당시 그러니깐 1988년도네요. 인천체고가 당시 사립 고등학교였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어요. 체육특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도 입학이 가능했어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육상에 입문을 했었어요. 처음엔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트레이닝을 시작했습니다.
2. 적성에 맞으셨나요? 특기자가 아닌 일반 학생이었잖아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천 대회 참가를 시작으로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어요. 입상을 하기 시작했죠. 인천대항전에서 1등을 했고 2학년 때부터 인천대표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시도 대항에서 3등 안에는 무조건 들었어요. 인천에서는 랭킹 1위, 전국랭킹으로는 2등~3등을 다퉜죠.
3. 육상으로 두각을 많이 나타냈네요. 그 당시 부모님의 반대는 없으셨는지요?
워낙 공부보다는 뛰어다니는 걸 좋아해서 전혀 반대는 없었어요.
4. 고등학교에서 많은 입상을 하셨으니 대학교는 당연히 운동으로 진로를 정하셨겠네요.
네. 대학교는 서울시립대학교 행정학과로 입학을 했어요. 서울 시청 육상팀에서 실업팀 선수생활을 시작했어요. 서울 시청 팀에서 800m, 5000m를 주 종목으로 스피드를 향상했어요.
4. 800m면 단거리인데, 왜 단거리로 변경하셨나요?
당시 1년 선배가 이봉주 선수였어요. 워낙 장거리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 제 스스로가 살아남아야 했죠. 마라톤 팀이 당시엔 있었어요. 90년대 당시는 대한민국이 마라톤 붐이었어요. 저는 스피드가 좋아 단거리 선수로 활동해서 두각을 나타냈어요. 전국체전에서 1500m 신기록도 수립했고 포디움*에도 여러 번 올라갔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마라톤으로 입문을 했습니다. 3년 차부터는 마라톤으로 전향해서 최고 기록을 달성했죠.
*포디움 : 마라톤 시상대
5. 마라톤은 길게 뛰는 운동이라 체력적으로 중장거리에서 마라톤 선수로 전향할 때 힘든 점은 없었나요?
뛰는 건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수생활을 하다 보니 기록도 중요하고 경쟁을 해서 대회에서 이겨야 하기 때문에 더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90년대만 해도 대한민국의 마라톤의 중흥기였죠. 황영조, 이봉주 등 현재까지도 유명한 선수들이 활동했던 시기니깐요. 저도 그 시기에 활동을 했으니 경쟁하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였고 힘들었어요. 조금만 못하거나 훈련을 소홀해해도 도태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랬으니깐요. 90년대가 한국 신기록도 나오고 한국선수들이 가장 기록이 좋았던 시기였죠.
-맞아요. 그때 일반인들이 마라톤을 한다. 조금 생소했던 거 같아요.
네.. 마라톤은 엘리트 위주의 체육이었기 때문에 당시에 아마추어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어요. 90년대 선수들의 활약상이 좋아서 동아마라톤이 세계대회로 위상이 커지고 대구마라톤도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마라톤은 혼자만 하는 운동이라 경쟁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육상선수로서는 0.0001초로도 승부가 결정하는 것이기에 더 빨리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한계에 도전했던 그리고 치열하게 훈련하고 대회에 나가 달려야 했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대단해 보였다. 나는 가끔 마라톤 결승점에 서서 선수들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다. 각각의 사연이 있고 42.195KM를 완주한 그들의 모습이 그 자체로도 자랑스럽다. 그 모습을 보고 에너지를 얻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6. 마라톤에 첫 입문해서 나온 기록이 어떻게 되나요?
대학교 2학년 때 호놀룰루 마라톤을 참석했어요. 1992년으로 기억납니다. 마라톤 기록이 아마 2시간 20분 03초였죠. 9위를 했어요. 당시 이봉주선수가 7등을 했고 외국선수가 1등을 했죠.
-한국선수 1등은 누구였나요?
서울시청 소속 조명하 선수였어요.
-호놀룰루가 해외 마라톤 장거리 선수로 첫 데뷔전이었는데 기분이 어땠나요?
날씨 때문에 더워서 힘들었지 워낙 훈련을 많이 한터라 기분은 후련했어요.
7. 마라톤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맘이 들지는 않았나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시기였어요. 저의 선수생활에서 전성기 시기여서 빨리 커리어와 기록을 쌓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3학년 때 가을 춘천마라톤에서 2시간 13분 07초 저의 최고 기록을 세웠죠. 그날은 비가 왔어요.
-비가 오는데도 기록이 전보다 7분이나 단축되었네요. 비결이 있나요?
춘마 코스가 어려운 코스 중 하나입니다. 스피드, 인터벌, 지속주, 거리주 훈련을 꾸준히 했고 가장 도움 되었던 훈련은 산악훈련이었어요. 산을 타면서 근력을 키우고 그 덕분에 기초체력이 많이 좋아진 거 같아요.
8. 서울시청 팀 소속일 때 하루 일과는 어땠나요?
빡빡했어요. 아침, 오후로 훈련, 거리 주로 훈련하면 거의 매일 40km 이상을 훈련했어요. 조깅은 100~120분이 기본이었고요. 주당 거의 200km 스케줄을 소화했어요. 주 3회 포인트 훈련이 들어갔네요.
-와~주당 200KM면 대박인데요. 거의 한 달에 800~1000km를 소화해낸 건데... 부상당하거나 훈련하기 싫은 날도 있었을 텐데. 그런 날 있잖아요. 훈련 엄청 하기 싫은 날
그런 거 없었어요. 그냥 컨디션에 상관없이 모두 소화해 냈어요.
9. 그런데 코치님은 부상 이야기가 많이 없었던 거 같아요. 부상을 크게 당한 적이 없었나요?
다행히요. 크게 당한 적은 없었어요. 아킬레스, 무릎, 종아리 등 사소한 부상은 있었는데 크게 어디가 아프고 한 곳은 없었어요.
-비결이 있나요?
주법과 강약조절이죠. 그리고 기본적으로 꾸준한 훈련이 뒷받침되어 주면 됩니다. 스케줄에 따라 휴식을 잘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부상이 없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선수들보다 부상이 작았다는 건 운이었던 거 같기도 합니다.
-그럼 큰 슬럼프도 없었겠네요.
그렇죠.. 큰 슬럼프도 없었어요.
10. 달릴 때 무슨 기분과 생각으로 달리나요?
무아지경이죠. 그리고 겁도 납니다. 트랙 훈련은 워낙 자신 있게 한 훈련이라 겁이 안 나요. 도로로 나가서 뛸 때는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라 겁도 나고 힘이 들었어요. 저의 장점이 스피드였는데 도로주는 꾸준히 달려야 하는데 특히나 스피드 있게 도로를 달릴 경우는 힘이 들었죠.
11. 좌우명이나 코치님에게 힘이 되는 말이 있나요?
열심히 항상 꾸준하게 지금까지 한길만 파고든 거 같아요. 늘 하는 말이죠. 땀은 배신하지 않는다. 노력의 대가는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을 많이 당해 보셨나 봐요. 배신하지 않는다 라는 말을 좋아하시네요^^
그건 아닌데... 현실적으로 꾸준하게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냥 열심히 하는 거죠. 그러면 마라톤은 결과가 정직하게 나오는 거 같아요.
12. 코치님이 존경하는 선수가 있나요?
게브라 셀라시에입니다. 뛰는 주법이 좋아 많이 보고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요.
코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마라톤 한 길만을 파고든 장인이었다. 그런 코치님에게도 존경하는 선수가 있고 그 선수의 주법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고. 늘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묵묵히 주어진 길을 가는 모습. 그가 마라톤을 택한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
대학졸업 후 실업팀에 입단하여 선수생활과 코치생활로서 인생 2막을 열었다. 현 마라톤의 문제점과 대한민국 마라톤의 발전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스토리는 2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