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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명 May 07. 2024

비 오는 날 뛰어본 적 있나요?

우중런! 우주런!

  우중 런, 왠지 단어가 우주랑 비슷한 느낌. 비는 자연이며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요소이다. 하늘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비, 그 속에 있으면 하나의 자연물이 되어 성장하는 느낌. 내가 우주와 조화를 이루는 생명체가 된다. 그래서 우중 런을 다른 말 우주 런과도 비슷한 의미에서 일맥상통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단순하게 우중 런은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뛰는 것이다. 러너들이 우중 런을 했다고 하면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한다. 아무리 달리기를 좋아하더라고 비가 억수같이 오는데 우비를 입거나 혹은 입지 않거나 무작정 달리러 나가는 사람은 없다. 항상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보슬비인지 언제 그칠지 체크를 하고 달릴 준비를 한다. 훈련이 잡혀 있다면 주로가 안전한지 확인하는 것까지. 러너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넘어져 부상을 당하면 안 된다.


  작년 장마 때쯤이었나 보다. 비가 갠 걸 확인 후 뛰러 나갔다. 잠깐 걷는 사이 나무를 심어놓은 주로 옆 보도블록을 밟았다 '꽝' 넘어졌다. 그 순간 급해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엉덩이에 멍만이 흔적을 남긴 줄 알았는데 손가락뼈가 부러졌다. 한 달 넘게 깁스를 하고 살았다. 비 오는 날은 주로가 안전한지 꼭 체크해야 한다.      


  오늘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이었지만 일어나니 밖은 어두웠고 공기는 상쾌했다.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어 확인하니 대지는 젖었고 나무 잎은 빗방울을 머금은 채 촉촉, 더 선명한 초록빛을 뽐냈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카톡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천 시 취소가 될지 모르는 모임소식.     


"밖에 비가 오지 않아 정모는 계획대로 진행합니다. 저는 운동장으로 출발합니다."     

잠깐 고민한다.


“고민은 잠깐, 행동은 바로” 나의 모토대로 마음 바뀌기 전에 옷을 입었다.  비가 오니 반바지에 어차피 젖을 거 양말도 아무거나 신고 수건하나 꼭 챙겨 훈련장소로 출발했다.     


 "아이고 비 오는데도 나오시고."     

 먼저 나온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날뛰는 사람들은 진짜 달리기에 진심인 사람들이다. 그러니 서로를 칭찬해 준다. 운동 시작 전부터 벌써 운동을 다 끝낸 사람처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고      

"오늘은 빌드업 훈련입니다."

"빌드업? 인터벌인가요?"

"아니요. 빌드업은 본인 페이스보다 45초 늦춰 3km를 뛰고 그다음은 3km씩 페이스보다 더 빨리, 마지막 1km는 질주입니다."     


  항상 마라톤 용어는 낯설다. 어쨌든 페이스보다 결국 빨리 뛰는 스피드 훈련, 결론은 10km를 뛰어야 한다는 것이다.     


  뛰다 보니 이슬비에 옷이 젖기 시작했다. 가지고 간 수건으로 닦아본다. 옷이 더 많은 물기를 머금는다. 오랜만에 오락가락하는 봄비가 밀당을 한다.      


  빗 속을 뛰다 보니 작년 첫 우연히 시작된 우중 런이 생각났다. 매년 5월 4일은 여성마라톤이 열리는 날이다. 말이 여성마라톤이지 남성 참가자도 많고 3km 걷기 코스가 있어 가족 참가자들도 많다. 올해는 맑은 날씨에 개최가 잘 되었지만 작년은 달랐다. 전날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왔다. 당연히 대회 취소나 연기 소식을 기다렸지만 비가 와도 진행된다고. 함께 3km 걷기를 신청했던 친구와 고민했다.

     

"그래도 가보자. 안전하니깐 이런 날씨에도 오라고 하겠지?"

"안 가고 후회하느니 가보자."     


  아침 6시부터 상암행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일찍 대회장에 도착했다. 비는 괜찮지만 바람이 너무 불어 대회가 불가능할 듯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풍선들이 다 날아가자 설치 5분도 안되어 풍선은 철수되었다. 추위를 피해 비옷을 입은 사람들은 천막 밑에서 오손도손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모여 있었다.


"이런 날인데 마라톤을 개최한다고?"


  친구와 천막 밑에 자리 잡고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펴봤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비를 피하며 불평하는 사람 없이 축제를 즐기러 온 행복한 표정이었다.     


  10km, 5km 주자가 차례대로 출발하고 3km 걷기 대기 선에 섰다. 출발신호와 함께 걷는데 입고 있는 비옷이 거추장스러웠다. 비옷이 무릎까지 오니 걸을 때마다 무릎에 부딪혀 아파오기까지 했다. 비옷을 벗어버리고 비를 맞기로 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흙길로 변했다. 빗물에 흙은 이미 진흙이 되고 물고랑이 생겨 밟을 때마다 운동화로 흙탕물이 들어와 이미 운동화와 양말은 만신창이. 많은 사람들이 웅덩이를 피해 다니느라 좁은 길이 더 좁아졌다. 날씨가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왜 이런 날 대회를 개최해서' '나는 여기 왜 왔나?' 툴툴거리며 3km 마지막 지점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10km 주자들이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리는 비와 상관없이 질주하면서 피니쉬를 향해 뛰어가는 모습. 한 참가자는 비에 젖은 웃옷이 방해가 됐는지 싱글렛을 벗어버리고 대기하고 있던 가족에게 전달해 줬다. 스포츠웨어만 입은 채 멋지게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이 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그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 멋지지 않은가. 그날 나는 멋진 사람이 되지 못했다. 비가 오는 상황 탓을 하며 툴툴거리는 인사이드 아웃의 까칠이였다. 여성마라톤을 완주하고 느낀 점은 “비 오는 날 뛰어도 괜찮다”였다.      


  그날, 그 대회의 기억이 평범한 달리기 생활의 변곡점이 되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달리기를 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지만 비가 내리거나 그쳤나를 반복하는 날, 이슬비가 내리기는 하지만 그칠 느낌이 든다면 젖어도 되는 오래된 러닝 화를 신고 수건 하나 목에 걸치고 달리러 간다.      


"비 오는데 정모 갈 거야?"

"비 오는 날 안 뛰어봤지? 꼭 뛰어봐."     

  나 혼자 이 느낌을 맛볼 수 없어 주변사람들에게 전파했다.      

"비 와서 오늘 정모 취소입니다."

"안됩니다. 비 와도 정모 하십시오. 저는 나갑니다."

"일기예보 보니 그칠 거 같은데……. 진행합니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과 그 해 망우리 공원 오르막을 달리고 운동장트랙 물웅덩이를 첨벙이며 비 오는 날 많이도 달렸다. 내 나이쯤 되면 어릴 적 비가 오는 날에도 항상 우산을 썼다. 흠뻑 비를 맞은 기억이 없었다. 소나기에서 비를 맞는 소년과 소녀가 부러웠고 영화 클래식에서 옷 하나를 우산 삼아 뛰는 손예진과 조인성이 부러운 시대. 늘 우산이 되어주는 부모 그늘 밑에서 자랐다. 물웅덩이조차 첨벙첨벙 거리며 놀아 본 기억이 없는 시대.      


  어른이 되어 비를 맞고 뛰어보니 왜 이 경험을 이제야 하는지. 비에 옷을 조금 젖으면 찝찝하지만 흠뻑 젖으면 비가 더 오나 덜 오나 마음을 비우게 된다. 마음을 비우면 달릴 때 더 신이 난다. 더 이상 환경 탓, 날씨 탓을 하지 않게 된다. 머리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면 강아지가 비를 터는 양, 몸을 털어 내거나 머리를 쓸어내려본다. 땀인지 비인지 모를 방울들이 온몸을 감싼다. 여름비가 내려 솔솔 부는 찬바람이 뛰면서 흘린 땀을 식혀주니 고마울 뿐이다. 안개들이 자욱이 깔리면 드라마 도깨비의 남자주인공 공유와 이동욱이 멋지게 걸어 나오는 터널 장면의 여주인공이 된 것 마냥 신비로운 경험도 한다.     


  운동을 다 하고 난 후, 비를 맞고 젖은 옷의 찝찝함 보다 이런 날에도 운동을 한 나 자신이 특히나 더 자랑스럽게 느껴진달까. 모든 일이 그렇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그 모습이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비가 온 날은 미세먼지 걱정도 없다. 비록 쌓이는 빨랫감과 운이 좋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뛰고 나면 체온관리에 신경을 써야 한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의 뒷 풀이가 생각나지만 바로 집으로 가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그날의 달리기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내리는 비를 보며 커피 한잔과 함께. 이런 날 달린 나를 자랑스러워하며.


  상황 탓, 여건 탓, 환경 탓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은 하자. 안 하고 후회하느니 뭐든 한번 시도해 봐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으니깐. 후회와 미련 따위는 빗물에 씻겨 내려가게. 2024년 그 해 첫 우중 런, 빌드 업은 아니지만 10km 달리기는 성공했다. 올해는 몇 번의 우중 런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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