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 또 금방 갔다. 아이에게는 주말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학교를 가야 하는 월요일이 다가왔다. 슬퍼야 할 이유가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한 주가 휙 하니 지나가 버린 것, 너무 쏜살같이 가버려 아쉬움만 남을 뿐이다. 한 주가 4번이면 한 달, 그 한 달이 12번이면 1년이 훌쩍 흘러간다. 나이에 숫자 하나가 더해진다. 어느 순간 병원 진단서나 약국 봉지 내 이름 옆 괄호 속 적힌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벌써 내가......
얼마 전 좋아하는 김신지 작가의 신작 <제철 행복>을 읽었다. <한해를 잘 보낸다는 건 계절이 지금 보여주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산다는 것> 책을 소개하는 멘트부터 두근두근. 어떤 내용일까? 항상 좋아하는 것을 볼 때 첫 마음은 설렘이다.
책에서는 1년을 24 절기로 나누고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여섯 절기로 나눴다. 입춘, 경칩, 춘분, 입하,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대설, 동지, 소한, 대한 등 익숙하거나 들어본 듯 한 절기도 나오지만 청명, 곡우, 소만, 만종, 한로, 상강 등 처음 들어본 절기들도 쓰여있다. 작가는 한눈에 보기 쉽게 동그란 표를 4등분으로 나눠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각 절기마다 작가의 경험과 메시지들이 전해지고 이야기 끝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 3가지씩을 적어두었다. 3가지 일을 모두 하면 아니 한 가지씩이라도 실천하도록 노력해도 올 한 해 보람차겠지.
올봄, 나의 경험들을 생각해 본다. 청명인 4월 5일 무렵부터 벚꽃 구경을 했고, 곡우인 4월 20일쯤엔 책에 등장한 라이더들의 성지인 양평 돌미나리집에 방문해 작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주문해 먹었다. 작가는 돌 마니리집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북한강을 향해 열린 등나무 아래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웰컴푸드처럼 소쿠리에 미나리 한 줌이 담겨 나온다. 싱싱한 미나리 몇 줄기를 집어 돌돌 말아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향긋한 봄이 입안에 가득 찬다."
생 미나리는 계속 리필이 된다는 점. 두 번 정도 리필을 하고 소쿠리가 비어져 갈 때쯤 주문한 미나리 전과 비빔국수가 나온다. 바삭한 미나리전 위에 국수를 얹어 먹으면 입안에서 봄이 정말 요동을 친다.
"달아오른 볼을 바람에 식 하며 길 건너 북한강을 바라본다. 더 바랄게 없어지는 봄날 오후이다. 이 집의 주인은 풍류를 아는 이가 틀림없다."
글을 읽으면서 '맞아. 나도 이 생각을 했어. 공감 백 퍼센트' 미나리집 사장님은 분평 삶을 즐길 줄 아는 사장님일 것이다. 아니면 철인이거나. 괜히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뿐인데 '나에게도 글쓰기의 소질이 있어'까지 생각은 뻗어 나갔다.
지금은 입하, 5월 초, 싱그러운 여름의 출발선, 지난주부터 밤 뜀박질을 할 때 코 끝으로 은은한 아카시아 향기가 전해졌다. 러닝 파트너 주형이 엄마의 제안으로 다음 날 아침, 동네 뒷 산으로 산책을 갔다.
어젯밤 맡았던 향보단 약했지만 산책로는 익숙했던 꽃 향기로 감싸였다. 작년까지만 해도 산책길 초입에는 텃밭이 크게 조성이 되어 있었다. 현재 시에서 그 땅을 매입해 공원 입구 쪽에는 막바지 공사가 정리 중이었다. 인부들이 예쁘게 핀 꽃들로 정원을 가꾸고 있었다. 데크로 만들어진 산책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왕복으로 두어 번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늘 그 자리에 있던 나무에서 처음 본 하얀 꽃, 주렁주렁 작은 종이 여러 개 모여있는 모습. 그 옆에 비슷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 자세히 보니 두 나무의 꽃 모양이 다르다. 색은 같지만 얇게 삐죽하게 여러 방향으로 잎이 뻗어있었다. 시골에서 자란 주형이 엄마는 식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언니.. 이게 아카시아, 이건 이팝나무예요. 가까이 와서 냄새 맡아봐요." "이팝이 냄새가 더 강하네. 이팝이 남자라면 아카시아는 여자 같아."
항상 궁금해했던 두 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종 모양은 아카시아, 삐죽이는 이팝이었다. 사진을 찍어 잊지 않게 기록해 뒀다. 다음번에는 딸에게 가르쳐 줘야겠다.
항상 멀리서만 봤던 두 나무, 가까이서 보니 생김새도 다르고 향기도 달랐다. 자세히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라고 말하는 나태주 시인이 생각났다. 가을 절기에는 도토리를 관찰해 볼 것이다. <제철 행복>에서 도토리도 종류가 모두 다르다고 한다. 올 가을이 벌써 기대된다. 산 다람쥐처럼 도토리를 수집하러 다니고 관찰일기를 써 볼 것이다. 주형이 엄마가 함께 해주겠지? 그녀가 만들어주는 도토리 묵과 양념도?
학원 원장으로서 나의 절기는 6개로 단순화되었다. 새 학기 준비와 동시에 1학기 중간 기말 시험, 여름 방학, 2학기 중간 기말 시험과 긴 긴 겨울방학이 지나면 1년이 끝났다. 꽃과 단풍은 구경할 겨를도 없고 여름휴가는 성수기로 어쩔 수 없이 예약을 잡아야 했다. 5월의 제주도 유채꽃 여행과 10월의 단풍 구경은 중간고사 준비로 인해 20평 남짓한 콘크리트 사무실 안에서 사진으로 보기만 했었다.
그러나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주변 풍경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작년 왕숙천과 동네 하천을 뛰면서 계절마다 변하는 색을 느끼기 시작했고 기온의 변화도 온몸으로 느꼈다. 하천의 오리새끼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행운도 가졌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누구보다 자연을 일찍 느끼게 되는 특권도 주어졌다. 매일 아침 뜨는 해를 누구보다 빨리 보고 시작하는 하루. 해를 시작으로 자연물 즉 무용이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카시아의 꽃 향기도 뛰면서 알게 되었고, 올해 벚꽃 구경도 달리기 코스를 알아보다 멋진 곳을 발견했다. 달리기는 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준다.
한국에서 마라토너로서의 절기는 크게 2개로 나뉠 거 같다. 3월 동아마라톤을 시작으로 봄이 온 것을 알고 10월 춘천마라톤과 JTBC마라톤으로 가을을 느끼겠지. 겨울은 봄 시즌 마라톤을 준비하고 여름은 가을 시즌을 준비한다. 1년의 마지막 결산인 손기정 마라톤과 시즌마감 레이스로 마무리된다. 마라토너의 1년 절기는 몇 번일까?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나이 속도만큼 빨라진다. 계절을 모르고 살았지만 지금은 계절을 느끼며 살아간다. 차를 타고 갈 때 창밖을 보지 않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창 밖 풍경과 구름을 보고 자연과 가까워진다. 옛사람들이 날씨에 맞춰 절기를 나누고 각 절기마다 해야 할 일들을 빼곡히 적어 놓은 글을 읽어보니 자연이 주는 변화의 위대함과 조상들의 지혜에 숙연해진다.
"내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오!"<미스터 선샤인>에서 배우 변요한이 말한다. 무용의 것, 꽃, 바람, 달, 해, 구름 등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나이. 아름다워 계속 보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우니 이름을 알고 싶어 진다. 무용함이 전해주는 유용한 아름다움. 이제 이런 아름다움을 모아야 하는 나이. 흘러가는 세월을 아쉬워하지 말고 주변에 있는 아름다움을 하나씩 발견해 나가려 한다. 가는 시간은 흘러가게 두고 순간을 살아가면서. 노래 가사처럼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