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는 방법
살다 보면 우울함이 삶을 잠식할 때가 있다.
달리다 보면 무력감이 나를 지배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순간이 오면, 나는 흘러가는 대로 그 기분에 나를 맡기며 받아들이는 편이다. 대개는 짧으면 반나절, 길면 며칠 만에 사라지곤 하기 때문이다. 내면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서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는 것. 화려한 기쁨 뒤의 어두운 슬픔을 인정하는 것. 그 역시 소중하다.
이렇듯 슬픔은 내 인생에서 가끔 찾아오는 오래된 친구지만, 때로는 그에게 크게 한 방 맞을 때가 있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입맛이 없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주인의 슬픔을 받아들이느라 힘들었던 내 몸뚱이는 체중이 많이 줄어들음으로써 그 힘듦을 토로했다. 기나긴 슬픔의 잠식기간을 거쳐 이제는 좀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오래 떠나 있던 행복을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빠와 함께 회사를 출근했다. 광화문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는 가끔씩 여의도까지 딸을 태워다 주신다. 반포대교를 건너 63 빌딩이 보이는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을 때, 문득 ‘아빠에게 행복을 찾는 방법을 물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만큼 근무하시고 이제는 회사 고문이 되어있는 아버지께, 알맞은 조언을 구할 수 있을까라는 희망을 품고 말이다.
“아빠, 아빠는 행복해?”
“그럼, 난 행복하지.”
“근데, 사람이 어떻게 늘 행복할 수가 있어?”
“음, 맞는 선글라스를 껴야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는데 대뜸 선글라스 이야기라니. 영문을 몰라 더 자세히 여쭤봤다.
세상을 바라보는 수단은 크게 두 가지다. 얼굴에 자리 잡고 있는 ‘외면의 눈’, 그리고 마음으로 바라보는 ‘내면의 눈’. 외면의 눈은 직설적이다. 보이는 그대로를 담아 나에게 전달해 준다. 그러나 내면의 눈은 제법 왜곡이 가능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선글라스는 내면의 눈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내면의 눈에 어떤 색 선글라스를 끼워주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검어보일 것이고, 밝은 색 선글라스를 끼면 세상이 화창해 보이는 것처럼.
더 중요한 건, 그 선글라스를 끼우는 건 오로지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는 건 사랑하는 가족도 아닌, 좋아하는 친구들도 아닌, 오로지 나 자신이기 때문. 행복해지고 싶어서 타인에게 기댈 수는 있지만, 그들의 역할은 내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고 응원해 주는 것까지다. 철옹성으로 둘러싸인 내 내면의 눈에 다가가는 건 나 혼자서 해내야 한다.
행복해지는 법을 잊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선글라스 이론’은 제법 큰 지침이 되었다. 슬픔과 오랜 시간 함께했던 나는 그동안 심연을 헤매며 세상을 어둡게만 바라보았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슬픔을 정확하게 느낀 후, 행복해질 준비가 되었을 때 내 의지로 밝은 프레임을 끼우고 세상으로 나오면 되는구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어렵기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이구나.
생각에 잠겨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윙크하며 마지막 한 방을 날리셨다.
“슬픔을 견뎌낸 사람의 눈을 보면 참 깊더라. 딸은 지금 더 성숙해지는 과정을 겪는 거야. 얼른 배우고 다시 행복을 찾으러 와. 아빠는 늘 응원해.”
끝이 안 보이는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옆의 소중한 사람들 덕에 이제 저 멀리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 빛을 향해 지치지 않고 나아가는 건, 이제 오로지 내 몫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