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게 하는 문장들

by Karma

문득 마음을 때리는 문장이 있다.

같은 책 한 권을 읽어도, 읽을 때마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갖고 읽느냐에 따라 더 잘 보이는 구절이 생긴다. 유난히 존재감이 확실했던 겨울을 지나 곧 입춘을 맞이할 오늘, 내 마음을 때린 구절 몇 개를 소개한다.


<무게 중심을 자기 밖에서 자기 안으로 옮겨야 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김용수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삶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향해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며 내가 기준점이 되면 내 세상에서 타인은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 타인은 그저 나와 다를 뿐, 내가 틀린 것도 아니며 그가 맞는 것도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무게의 추를 내면에 두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면 타인에게 비굴하지도, 기죽지도 않는 당당함이 생긴다. 기억하자. 오로지 나 하나로도 세상은 꽉 찰 수 있다. 행복을 도둑맞고 싶지 않은가? 내 삶의 무게중심을 내부에 둔다면 행복은 있다가도 없어지지 않고, 누가 함부로 빼앗을 수 없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지 않아도 된다.


<젊을 때 성실하게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기초 체력 쌓기 훈련 같은 거라서, 몸과 정신에 각인시킬 수 있을 때 해놓지 않으면 훗날 진짜로 노력해야 할 때 노력하지 못하거나 아예 노력하는 방법 자체를 모를 수 있다.>

『태도에 관하여』 - 임경선


젊음의 기준은 다양하게 세워볼 수 있다. 한 사람이 1. 스스로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고 2.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며 3. 그 호기심을 채워줄 체력이 뒷받침되어 줄 수 있다면 단순한 숫자적 나이를 초월한 의미의 ‘젊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젊은 사람 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 열정이 있을 때 온 힘을 다해 노력했거나 몰두한 경험이 없이 성장해 버리면 ‘헐렁한’ 어른이 된다. 헐렁한 어른은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 ‘이건 나의 최선이 아니었으니까’라며, 마치 어딘가에 자신의 최선이 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에게 도망갈 여지를 준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젊음과 열정을 무기 삼아 도전을 하는 사람들은 연륜같은 지혜는 없지만 무모한 용기가 있다. 청춘만이 가지는 특권인 ‘용기’를 이용해 삶의 근육을 키워가다 보면, 현명한 어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억지로는 안되어, 아무리 애가 타도 앞당겨 끄집어올 수 없고 아무리 서둘러서 다른 데로 가려해도 달아날 수 없고.

지금 너한테로도 누군가 먼 길을 오고 있을 것이다. 와서는,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겄지. 물 한 모금 달라고.>

『혼불』 - 최명희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동물이 인간이기에, 타인 간의 관계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인연이 시작되지 않았기에 공허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미 만난 인연에 대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정답을 알고 있다. 우리에게도 꼭 맞고, 잘 타협할 수 있고,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누군가가 한 명쯤은 있을 거라는 걸. 인연이기에 더 소중하고 그렇기에 더 얻기 힘들고 인내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은 항상 갖기 어려운 것임을 기억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자. 그러면 어느 순간 누군가가 다가와 나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할 것이다. 나는 열심히 여기까지 달려와 이제야 너를 찾았다고. 물 한 모금 달라고.


<“아마도 우리는, 세상에 진 빚을 갚아야 했을 테니까.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말이야. 우리가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지서가 이제야 돌아온 거야.”>

『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업보(Karma)’를 믿는가? 흔히들 업보는 운명과 비교하여 쓰인다. 큰 틀에서 인생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과는 달리, 업보는 내가 하는 작지만 수많은 행동들이 쌓여 나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이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되는 ‘운명’보다는 어쩌면, 인과응보의 측면에서 더 공명정대하고 아름다운 개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업보는 누군가에게 통하고 누군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라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인과적 흐름이다. 나의 행동에 내가 책임을 지는 것. 책임의 영역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서 누구나 가슴 한편에 새기고 살아야 할 마지막 정의로움이 아닐까? 업보는 절대 주소를 잘못 찾아가지 않는다고 하니, 늘 더 먼 곳을 생각할 줄 알며 양심껏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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