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나팔꽃

by 박유진

세탁기는 마치 미쳐버린 것처럼

빙글빙글 잘만 돌았지


우유 한 방울 없이

입안에 머금은 시리얼 한 조각도

조용히 잘만 녹아내렸고


들일 사람이 없는데도 활짝 열어놓은 문은

마치 나를 좀 봐달라는 듯

끼익거리는 날카로운 소음을 내었어


참 이상하지, 세탁기 말이야

시리얼과 열린 문 말이야

나팔꽃 필 시기의 뒤늦은 태양빛

그 밑에서 땀 흘리던 너 말이야


너는 미쳐있었지만 빙글빙글 돌지는 않았고

시리얼 한 조각처럼 밋밋하게 달았지만 녹아내리지 않았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좀 봐달라고 두 팔을 열어주지도 않았잖아


재미없다고 생각했어

너는 세탁기에 돌린 나팔꽃 같으니까

물이 뚝뚝 떨어져고 꺾여버린 줄기 같으니까


그러니 나는 세탁기에 비치는 안쪽을 봐

그러면 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알겠으면 우리 집 세탁기에 그만 몸을 숨겨

너는 깨끗해질 수 없고

나팔꽃은 언제나 시들어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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