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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문의 Apr 10. 2023

의사 국가고시를 치르던 날 - 둘쨋날

나의 목에 걸려지는 합격목걸이

드문드문 서있는 가로등이 세상을 까맣게 덮은 어둠을 밀어내던 1월 6일 새벽 5시

전날처럼 우렁찬 수탉 한 마리가 나를 깨웠다

전날처럼 계란 샌드위치도 핫식스도 양껏 먹었고 단순 암기 내용들을 복습했다.

전날처럼 버스정류장에는 행정실 직원분들과 교수님들께서 전날처럼 응원을 해주셨다.

달라진 건 이 상황을 한결 여유롭게 받아들이는 나와 쉬는 시간에 먹을 간식뿐이다.

어제 먹었던 초콜릿이 맛이 없어서 어젯밤 편의점에서 비싸지만 맛있는 초콜릿을 가방에 챙겨두었다.

비싼 초콜릿을 먹을 때면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느낌을 받는다. 

진정한 소확행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걸까?



의료 법규도, 예방의학도 없는 오늘은 전날 시험에 비해 부담감이 절반도 안된다.

수능시험이 전날 벼락치기로 결과가 뒤집어지지 않는 것처럼, 체감상 수능 공부량의 10배에 육박하는 의사 국가고시 시험이 벼락치기가 통할리는 만무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치열했던 지난 나날들, 그리고  비록 인지할 수는 없지만 뇌주름 사이사이 채워져 있을 지식들을 믿는 것뿐이다.

다른 동기들도 다들 비슷한 마음인지 전날에 비해 조금은 시끌벅적한 버스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으로 향했다



105분의 3교시, 20분의 쉬는 시간, 또다시 105분의 4교시

최종 시험 종료 5분을 남기고 마지막 4교시의 답안지를 제출했다

남은 5분은 연말에 카운트다운을 세는 마음으로 시계를 보며 숫자를 셌다. 

"수고하셨습니다. 시험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앞으로 좋은 의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청량감, 뿌듯함, 후련함이 모두 뒤섞인 감정이 명치께부터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이동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모든 긴장이 풀려 온몸에 힘이 빠졌다가, 시험이 끝나 들끓는 에너지로 인해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가 반복되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기나긴 레이스를 완주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중포 없이 달려왔던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이제 시험은 내 손을 떠났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사실에 만족했다

한때는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결과를 바라는 적도 있었다.

하나 그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갉아먹을 뿐이라는 사실을 지난 6년간 배웠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욕심내지 말고, 주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



시험장을 나와 함께 고생한 친구들과 곧바로 고깃집으로 향했다.

시험도 끝났겠다, 낮부터 배가 터지도록 고기와 맥주를 마셨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으니 무얼 먹어도 맛있었고, 어떤 이야기를 해도 웃음이 나왔다.

이번 주말에 떠나는 졸업여행 때 무얼 할까, 다 같이 글램핑을 어디로 갈까, 펜션 예약은 어디로 할까

그동안 숨죽인 채 억눌려있던 생각들이 이때를 기다린 것 마냥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 기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일상이 펼쳐질 내일이 기대되었고 노는 것만으로 온 머릿속이 가득했다



기분 좋은 먹부림을 맘껏 즐긴 뒤 다음 목적지인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당연히 공부하기 위해 갔을 리가 있나

시험이 끝났으니 스터디 카페 사물함과 자리에 남아있던 짐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 스터디 카페를 향할 때의 발걸음과, 정리를 목적으로 향할 때의 발걸음은 그 무게와 속도가 달랐다

몇 달간 공부하던 자리를 정리하자니 왠지 시원섭섭했다

지나 몇 달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겠지

누구일지 모르는 다음 사람의 성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내 옆자리와 앞자리에 앉아, 시나브로 얼굴이 익숙해진 공시생들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직접 말을 섞어보지는 않았지만, 내적 친밀감이 쌓인 그분들에게 여러모로 감사한 점들이 많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는 그 사람들을 보며 자극을 얻었고, 스스로를 여러 번 되돌아보았었다.

특히나 내 자리에서 1시 방향에 위치한 장발머리 남자분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였고, 공부하는 사이에 단 한 번도 휴대폰을 보지 않는 엄청난 자제력을 보여주었다

훌륭한 공부 분위기를 만들어준 그분께는 지금까지도 감사한 마음이다



며칠 전 시험이 끝나는 날 커피 한 잔 하자시던 사장님을 기다리면서,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시던 선생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5년 먼저 느끼셨던 선생님께서는 앞으로의 병원 선택할 때 고려할 부분, 인턴생활의 팁 등등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학생 때 들었었던 조언과는 또 다른 종류의 조언을 듣고 있으니 새삼 정말로 국가고시가 끝났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선생님께 담소를 나누던 와중에 사장님께서 오셨고 우연하게 한자리에 있던 낯선 조합의 세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여러 가지 좋은 말씀을 듣고 나니 다시 하늘에 어둠이 드리워졌고, 그 무렵 국시원 홈페이지에 시험 정답이 업로드되었다.

단톡방은 채점 결과로 시끌벅적했지만 결국 나는 답을 매겨보지 않았다.

가채점해서 얻게 된 부정확한 결과로 고민을 하기보다는 시험은 이제 내 손을 떠났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려 속 시원했다. 

결과가 궁금하긴 했지만 어련히 실력만큼 나오겠거니 생각했다.

졸업여행과 가족여행을 차례로 떠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

비행시간 동안 밀린 연락들을 하나씩 확인하던 차에, 예상치 못한 발신자로부터 카톡하나가 와있었다.




예상 성적발표일보다 하루 먼저, 국가고시원에서 합격통보가 카톡으로 와있었다.

합격소식은 꽤 덤덤하게 받아들여졌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했기에 내심 합격했을 것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인 걸까

마침 가족모두가 모여있어, 합격소식을 곧바로 전했고 그 자리에서 축하를 받을 수 있었다.

나보다도 더 들떠있는 동생과 나를 자랑스러워하심이 만면한 부모님을 보는 것이 합격한 사실보다 더 기뻤다.



다음날 상세결과를 확인해 보았다.

320점 만점 중 274점, 그리고 T점수 166점

T점수 -백분위 환산표로 계산해 보니 대략 상위 27.4%의 성적이었다.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은 이 성적을 나는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과정에 온전히 만족할 수 있으면, 결과가 어떻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난 의대생활동안 배웠다.



어느 집단내에서든, 상위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재능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때 재능과 노력은 상대적인 개념인데, 나의 재능과 노력은 주변사람들의 정도에 따라  그 위치가 결정이 되곤 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속한 집단은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의과대학'이었고, 그중에는 '타고난 재능이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며 벽을 느끼게 한 동기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1시간 수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2시간의 복습이 필요한 나는,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 암기까지 해내는 동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노력으로 재능의 틈을 메꿔야만 했다.

이때 노력에 대한 기준은 개개인마다 너무나도 달라,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한 축에 끼지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노력의 기준을 '자기 전 오늘하루를 되돌아보았을 때, 오늘하루가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정하고,  그 기준에 나를 집중시키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 치르는 6월 모의고사, 9월 모의고사에 각각 해당하는 1차 임종평과 2차 임종평에서 모두 3등급을 받았었는데, 성적이 한 등급만 더 올랐으면 좋겠다고 바랐으나, 결국 그러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험생활에 만족하기에 국시 3등급이라는 결과가 아쉽지 않았다.

(학교마다, 또 지원병원마다 산출방식이 다르지만, 편의상 의대 내신성적과 국가고시 성적은 10%씩 나누어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눈다)



혹여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의대생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몇 가지 있다.

국가고시 문제의 트렌드가 2022년 기준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

매년 문제가 진화해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문제를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환자의 병을 추측하고, 거기에 따른 진단과 치료방법을 맞추는 단편적인 문제들의 숫자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물론 그런 문제들을 모두 맞힌다면 국가고시 합격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 중에 틀리는 문제가 나온다면 합격을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진단이 명확하지 않은 케이스를 주고, 일차적으로 어떤 검사를 해야 하는지, 어떤 처치를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문제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물론 실제 진단되지 않은 환자들을 본 적이 없는 우리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고를 하기가 굉장히 낯설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ABC같이 기본적인 내용을 탄탄히 다져나가면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국가고시 시험은 내신이 낮더라도 1년 동안 열심히 한다면 충분히 잘 볼 수 있는 시험이니, 희망을 잃지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부로 대한민국 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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