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끼오~ 꼬끼오~"
아직 깜깜한 어둠이 세상을 품고있는 새벽 5시, 늘 듣던 익숙한 수탉 울음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리기 시작했고 나는 평소처럼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스마트폰 화면을 넘겼다.
스마트폰, 아니 핸드폰이 개발된 이후 수천개의 알람소리가 개발되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나머지 글만 읽어도 소리가 들리는 '빠빠빠빰 빰 빠빠빠빰 굿모닝' 부터 누적 다운로드 수 1천만에 돌파하는 알람몬까지, 바쁜 현대인들을 효과적으로 깨우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이 있어왔지만 나의 하루를 깨우는건 다름아닌 우렁찬 수탉소리 였다.
내 DNA 안에, 수십만 년 동안 수탉의 울음소리로 하루를 시작했던 조상들의 인생이 켜켜이 쌓여있기라도 한 것일까
듣자마자 눈이 번쩍 떠지는 소리는 나에게 아직까지 수탉소리뿐이다.
1023년에도, 2023년에도 김 씨 가문의 아침을 책임져주는 것은 우렁찬 목청을 가진 수탉이다.
어둠이 바닥까지 내려앉은 새벽 5시였지만 졸리지 않았다.
긴장을 한탓에 알람이 울리기 1시간 전부터 눈이 떠졌다.
조금이라도 자기 위해 눈을 감고 있었으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렸해져만 갔다.
전날 밤 친구와 저녁밥을 먹으며, 시험 때 긴장하는 건 하수라고 이야기했었다
친구들끼리 있으면 죽으면 죽었지 결코 약해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모든 남자들의 본능이다.
'쫄?' 한마디면 그 어떤 정신 나간 짓도 하게 되는 이상한 본능
시험 당일 긴장 때문에 1시간이나 먼저 깨어버린 사실은 영원히 묻어두련다.
일어나자마자 냉장고를 열고 전날 사두었던 계란 샌드위치와 핫식스를 꺼내었다.
계란 샌드위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면서 동시에 속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에 시험 당일 아침식사로는 제격이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커피가 아닌 핫식스를 선택한 건 커피의 강한 이뇨작용 때문이다.
시험도중 안절부절못하면서 화장실을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를 닦고, 세수를 하며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눈꺼풀 위의 잠을 털어냈다.
정신을 말끔히 한 뒤 마지막으로 의료 법규를 공부했다
바로 오늘을 위해 그동안 공부하며 마지막으로 볼 부분에 형광펜 표시를 해놓았다.
단순 암기로 외워야 하는 의료 법규는 휘발성이 너무 강하다.
의료법규를 잘하기 위해선 지식이 사라지는 속도보다 더 자주 눈에 바르고 뇌에 바르는 수밖에 없다.
시험당일 아침 법규를 보고 안 보고에 따라 과락이 결정된다는 선배들의 눈물 어린 조언이 떠오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력을 강하게 끌어올려주었다
간단한 아침 복습을 한 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쉬는 시간에 볼 KMLE 의료 법규와 예방의학, 초콜릿, 수험 표, 그리고 신분증
이전에 신분증을 집에 두고 와 토익시험장에서 5분 만에 집으로 돌아왔던 때가 떠올라 신분증만큼은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1월 5일의 새벽은 참으로 쌀쌀했다
마스크를 썼지만 새하얀 입김은 마스크를 기어코 뚫어내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귀마개와 모자, 장갑, 그리고 패딩으로 중무장을 한 채 발을 동동거리며 학교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오늘을 위해 공부한 지난날들을 떠올려보려 노력해 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아니 오늘이 시험날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건 익숙하지만 목표의 달성을 결정짓는 날은 그 빈도가 턱없이 적어서 늘 낯설다
버스정류장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버스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익숙한 얼굴의 행정실 직원들과, 학교 교수님이셨다.
"국가고시 합격하고, 좋은 의사가 되길 바랍니다. 파이팅. "
응원과 함께 꼭두새벽부터 준비했을, 군용 핫팩 2개, 그리고 쉬는 시간에 먹을 떡 세트를 한 아름 안겨주었다.
국가고시 합격과 좋은 의사
괜스레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없이 들어왔던 이 단어들이 오늘따라 낯설게 가슴을 간질였다.
아마 길고 길었던 수험생활의 끝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고, 어려서부터 동경해 왔던 의사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버스는 의사 국가고시 시험장으로 향했다.
국가고시 시험장을 향해 내달리는 버스 안에는 조용함과 비장함이 곳곳에 서려있었다.
준비해 온 자료를 한 글자라도 더 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친구
복잡한 심경을 정리라도 하듯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친구
전날 잠을 잘 못 자 고개를 떨구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는 친구
차멀미 때문에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는 친구
수십 명의 동기들은 각자 본인만의 자세로 다가올 시험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 조금씩 밝아오는 건물의 색채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시험 장소에 도착하자 낯선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지역의 다른 의과대학에서 온 사람들임에 분명했다.
처음 보는 얼굴에서 나와 같은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처음 듣는 목소리들이 익숙한 의학용어들을 빚어내고 있었다.
네 달 전 의사 국가고시 실기시험장과 비슷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체감하며, 우리 모두는 말 한마디 없이 합격을 향한 전우가 되었다.
의사 국가시험 시험장
안내 표지판을 보니 둔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하고 두터운 철문 앞에 문고리를 잡고 서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지난 6년 동안 나만의 열쇠를 만들었고, 바로 오늘 그 열쇠라 철통 같은 문이 열수 있는지 확인한다.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배정된 시험 자리로 향했다.
시험은 총 2일간 치러지며, 첫날 1,2 교시 둘째 날 3,4교시로 총 4교시 동안 320문제를 풀게 된다.
그중 의료법규 과락의 위험이 있는 1교시가 제일 결정적인 시간이다.
의서 국가고시는 의료 법규 20문제, 의학총론 60문제, 의학각론 240문제로 이루어진다.
이때 전체 과목에서 60% 이상, 그리고 각 과목에서 40% 이상 점수를 획득해야 필기를 통과할 수 있는데, 의료 법규는 단 20문제밖에 안 된다는 것이 수험생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의학총론과 의학각론을 다 맞더라도, 의료 법규에서 40%에 해당하는 8문제를 맞히지 못하면 과락으로 국가고시에 불합격한다는 것
의학총론과 의학각론은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처럼 의학지식을 묻는 과목이기 때문에 4년간의 본과 과정을 밟으며 지식들이 자연스레 축적된다.
하지만 의료 법규는 독립적인 과목으로, 의학지식으로 유추가 불가능한 영역이다.
20문제밖에 되지 않아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부담스럽고, 그러자니 너무 적은 시간을 투자하기에는 과락이 두렵다.
계륵과도 같은 의료 법규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의대생들에게 부담스러운 과목으로 손에 꼽힌다.
차분한 마음으로 의료 법규를 다시 한번 눈에 바르고, 남은 시간에는 예방의학을 눈에 바른다
코로나19 이후로 예방의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시험이 어렵게 나올까 열심히 준비했다.
예방의학은 법규보다야 덜하지만 의학지식으로 유추하기가 불가능하기는 매한가지
예방의학을 힘들게 공부했던 지난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신입생 시절에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초록색 병만 봐도 불쾌해지는 그 경험을, 본과 4학년이 되어서 의료 법규와 역학이라는 단어를 보며 다시 할 수 있었다.
모니터 앞에 앉아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일각이 여삼추였다.
마지막으로 머리에 넣었던, 아니 눈에 발랐던 내용들의 형체가 모호해지기 전에 시험이 시작되기를 바라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105분 동안 80문제를 정신없이 풀고 난 후 쉬는 시간이 되었다.
20개의 역학 문제 중 확실하게 맞는 답이 8개가 넘었음을 자신한 나는 학교에서 준비해 준 떡을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먹었다.
이번 시험이 너무 어렵다
이 문제의 답이 뭐냐
본인만 시험이 어려웠던 것이 아님을 확인하며 20분가량의 쉬는 시간을 보냈다.
의료 법규가 없는 2교시는 부담이 덜했고, 아는 문제가 나왔을 때에는 기쁨을,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는 막막함을 느끼며 어찌어찌 시험을 끝냈다.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 안, 내일의 시험이 남아있었기에 그리 후련하지는 않았다.
그저 잔잔한 감정을 느끼며 오늘 아침 응원을 받았던 그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
평소보다 머리를 많이 쓴 탓에 허기가 진 나와 친구들은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 항상 들렀던 중국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늘 먹던 짜장과 탕수육이었지만 오늘따라 감칠맛이 살아있었다.
식사를 끝낸 후, 집으로 가서 쉴까 스터디 카페로 갈까를 고민한 끝에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집에 가서 소파에 몸을 던진다고 해도, 마음의 찝찝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공부는 안 할지라도 몸이라도 의자에 앉아있자 하는 결론이었다.
매일같이 스터디 카페를 드나들며 친해졌던 사장님께서 한마디 건네셨다.
"오늘 시험 잘 보셨어요? "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요 "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으셨던 사장님은, 어떤 말로 나를 위로해야 할지 골몰히 생각하셨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어려웠을 거예요. 열심히 하셨잖아요 "
그 말을 꺼내시기 전, 사장님의 떨리는 눈동자를 본 나는 웃으며 분명 그럴 거라고 답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에 가보니, 웬 봉투가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스터디 카페에서 연계하던 도시락 업체의 직원분께서 주신 간식 봉투였다.
자취하는 수험생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는 식사다. 매일 식당에서 사 먹자니 메뉴도 질리고 가격이 부담된다.
또 집에서 해 먹자니 너무 귀찮다.
사장님의 혜안 덕분에 매 끼니 다른 메뉴를 스터디 카페로 배송을 해주는 도시락 업체를 이용할 수 있었고 지난 수험 기간 동안 정말 잘 이용했다.
시험 전날 도시락 업체 사장님께 감사의 문자를 보냈었고, 그렇게 나의 시험사실을 알게 된 사장님께서 간식봉투를 보내셨던 것이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장님과 직원분께서 나누어준 따뜻함으로 기운을 충전한 뒤, 내일 시험을 위한 마지막 마무리를 시작했다.
저녁 10시, 늘 걷던 집으로 향하는 길은, 마지막으로 걷는 길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지난 몇 달 동안 비가 오는 날도, 눈이 오는 날도 있었다.
걸어가는 날도 있었고, 전동 킥보드를 타고 가는 날도 있었다.
혼자 가던 날도, 친구와 함께 가던 날도 있었고,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는 날도, 맥주를 사서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수많은 아형을 가진 퇴근길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 신발자국이 남긴 가지각색의 퇴근길 위에 껌껌한 밤하늘로 칠하며 집으로 향했다.
검게 칠해진 이 길을 언젠가 다시, 밤 10시에 걸을 때에는 검은색을 걷어내며 지난 색색의 퇴근길들을 추억할 수 있음을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