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2일 05시 30분
첫 취업을 기념해 큰맘 먹고 구매했던 갤럭시워치에서 '삐비비빅' 하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울렸다.
거슬리는 느낌이 싫어 평생을 액세서리와 멀리했었지만, 혹시나 출근시간에 늦을까 하는 불안감이 거 슬림 따위는 가볍게 짓눌러버렸고 전날 잠에 들기 전 내 왼쪽손목에는 다소 어색한 갤럭시워치가 자리했다.
3월 1일은 폭풍전야의 Off였다.
첫날부터 당직을 서게 되어 어마무시한 첫 로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다른 동기들을 보며 나에게도 큰 것이 다가오고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누워있어도 마음이 불편하고 커피를 마셔도 마음이 불편하고,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타산지석의 마음으로, 또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동기들을 따라다니며 처방내는 방법을 배우고 술기를 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았다.
병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3월, 대형사고만큼은 반드시 피하자는 반드시 일념 하나로 인계장을 읽고 또 읽었다.
불안한 마음은 걱정에서 비롯되고, 걱정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번이라도 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한 번이라도 더 인계장을 읽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자정이 넘은 시간, 피곤함이 불안함을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침대에 몸을 던진 뒤 길어야 20분 안에 잠에 들었겠지만, 지난밤은 새벽 1시가 넘어서도 당최 잠에 들지를 못했다.
낯선 사람들, 낯선 직장, 낯선 서울, 낯선 당직실, 낯선 출근
이 한 몸뚱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낯선, 이 낯선 환경은 깊숙이 가라앉으려는 마음을 자꾸자꾸 들뜨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잠을 자보려고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써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광활하게 펼쳐져있는 초록빛의 목장에서, 고동색 나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를 뛰어넘는 양들을 세어보아도 약 20마리 정도 세고 나면 출근에 대한 생각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힘을 뺀 채 깊은 저 바닷속으로 침잠하는 상상을 하면 전쟁터에서 라도 5분 안에 잠에 들 수 있다고 알려진 '미해병대의 수면기법'도 그날따라 내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미지'로부터 오는 긴장감은 정말 난해하다.
알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을 털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직접 몸으로 부딪혀보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느끼는 긴장감은 당최 가실 줄을 몰랐다.
아무리 동기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도 직접 근무를 해본 적이 없으니, 아무리 준비를 해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병원 OT를 통해 교육을 받았고 술기영상들도 여러 번 돌려보았고 직접 근무를 하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준비했다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옛말에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지난밤 잠과의 사투 끝에 다행히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지만, 몇 시간을 잤었는지와는 상관없이 첫 출근의 설렘으로 내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말끔했다.
일어난 후 얼굴을 닦고, 낯선 근무복을 입고서 어디 흐트러진 곳이 없나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처음 입어보는 근무복의 촉감이 생각보다 까끌까끌했다.
왼쪽 가슴에 입사 후 받았던 명찰을 달고, 주머니에 수첩과 볼펜을 넣었다.
내가 모르는 모든 것들을 적어두고, 같은걸 두 번 물어보지 않겠다는 나만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결연한 준비 끝에 6시가 되었고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처방콜이 들어왔다고 알리는 알람음이 떠나가라 울리기 시작했다.
나름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었지만 동시에 쏟아지는 처방들을 직접 마주하니 거의 혼비백산이 되었다.
흉부 X-ray 촬영 처방을 내려고 하면, 촬영 방법에 따른 처방코드만 3개였고, 그중에 뭘 넣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턱이 없었다.
약처방은 얼마나 내야 하는지, 또 어찌어찌 몸무게에 비례해 계산을 끝내더라도 내가 계산한 것 맞는지 두세 번씩 확인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기본 Lab을 내달라는 처방에는 도대체 어디까지 Lab처방을 내야 하는지, 검체는 어떤 걸로 채취해야 하는지... 헤매고 헤매고 또 헤매었다.
2월 28일까지는 숙련된 선배 인턴선생님들에 의해 잘만 돌아가던 병원이 단 하루차이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아무리 일을 못해도 3월에는 괜찮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받은 첫 근무의 면책권이 있었다지만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전쟁과도 같았던 근무를 적당히 끝내고, 아침거리를 사러 지하 편의점으로 향했다.
6층에 위치해 있는 당직실에서 지하로 가기 위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 관계자 분께서 '선생님 여기에요'라며 엘리베이터를 잡아주셨다.
내가 선생님이라고?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본과 4학년때까지 어연 20년을 '학생'의 신분으로 살아온 내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꽤나 어색했고 동시에 기분이 좋았으며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
간질간질한 마음과 함께 샌드위치를 사고 돌아오는 길 중간중간 위치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민트색 근무복 위에 하얀 가운이 걸쳐있는 나의 모습
꽤나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급실에서 코로나검사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남에 의해 코가 쑤셔진 적은 많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코를 쑤시는 건 처음이었기에 관련 자료들을 열심히 공부했다.
특히나 명지병원에서 유튜브에 올려주신 '코로나19 검사 교육영상'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응급실로 갔으나, 현실은 영상 속처럼 평온하지 못했다.
분명 영상 속에서 검사를 받는 사람은 조용히 잘 협조해 주는 어른이었는데, 내 앞에 검사를 받기 위해 앉아있는 사람은 3살짜리 소아였다.
3살짜리 소아
그 현장의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에 이 이상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듯싶다.
우리 병원에서 출산 후, 퇴원하기 전 부모님께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업무도 있었다.
신생아들은 굉장히 미숙한 생명체이기에 태어나서 1년까지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소견들이 꽤나 많다.
얼굴이나 목에 붉은 점이 있다던지, 피부가 대리석무늬처럼 희끄무레하다던지
이런 소견들을 보호자들에게 설명해 주고, 안심시켜 주는 것이 인턴의 업무 중 하나였다.
신생아의 정상소견들에 대해서는 의대생이었던 시절 소아과 과목을 공부할 때 배웠었지만, 그 옛날의 지식만으로는 제대로 설명하기가 많이 부족함을 느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 3년 전에 공부했던 것과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시험을 보기 위해 외웠던 것과 오늘날, 아이의 보호자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외우는 것은 분명히 달랐다.
나는 내 설명으로 인해 아이의 부모님이 매일 아이를 보며 안심하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는 게 많아야 했다.
목적이 분명하다 보니 지식이 흡수되는 속도나 그 깊이가 달랐고 교과서에 나와있지 않은 내용들까지도 추가적으로 찾아서 공부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모님은 지금의 내 나이에 동생을 낳으셨다.
동생이 태어났던 그 병원에도 소아청소년과 인턴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인턴선생님은 지금 내가 했던 것처럼 우리 부모님에게 동생에 대해서 설명을 했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셨을까?
분명한 사실은 그 선생님도 우리 부모님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분명 열심히 공부하시고, 혼자서 연습하셨을 거란 점이다.
업무첫날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콜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늘 휴대폰 화면을 내 시야 안에 두었고, 콜이 왔는데 알람이 꺼져서 내가 못 받았을까 봐 수차례 확인해 보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이 정도로 휴대폰을 가까이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종일 휴대폰과 함께 있었다. 마치 휴대폰이 내 생명줄인 것처럼
내가 일처리를 제때 해야 다른 부서 사람들의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내가 콜을 못 받는 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러한 사실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조직생활이라는것이 어떤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어찌어찌 첫 근무를 마무리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내일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내일은 첫 당직날이다.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일의 내가 잘 해결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