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몸에서 ABGA를 할수있는 혈관은 대표적으로 Radial artery, brachial artery, Femoral artery, Dorsalis pedis artery 총 4군데가 있지만 그중 주변에 중요한 구조물들이 적어 술기 합병증이 가장 적은 Radial artery로 의사 국가고시를 준비했다.
그동안 학교 시험을 준비하고 또 국가고시를 준비하며 ABGA 술기모형으로 수십 번씩 연습해 보았지만 의식이 있는 환자에게 시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해보는것 처럼 보이면 검사를 하는 나도 불안해지고, 검사를 받는 환자도 불안해져서 지기 때문에 수도 없이 많은 경험이 있는 ABGA의 대가인것처럼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늘 있었던 검사를 하는것마냥 환자에게 다가갔다.
결과는 한 번에 성공
운이 좋게도 맥박이 잘 느껴지는 환자분이었다.
목표로 하는 Radial artery는 정맥처럼 겉에서 보이는 혈관이 아니다.
동맥은 몸속 깊이 위치하기 때문에, 손끝의 감각으로만 의존해서 혈관이 흐르는 길을 찾아야 한다.
마치 눈을 감고 벽을 짚어가며 미로를 탈출하는듯한 느낌이랄까
Radial artery를 찾는 내 모습은 환자분들이 보기에 한의사 선생님들이 두눈을 감고 맥을 집는것과 결코 달리 보이지 않을것이다.
손목의 엄지손가락쪽을 두손가락을 짚어가며 맥박이 가장 크게 두근거리는 지점을 찾는것이 ABGA 핵심이었다.
실전 ABGA가 모형으로 연습할 때와 달랐던 점은, 주사기에 헤파린을 코팅하는 방법 그리고 환자분들의 통증이었다.
실기시험 준비 때는 직접 주사기에 헤파린 코팅까지 해야 했으나 우리 병원에 있는 ABGA 전용 주사기에는 미리 헤파린 코팅이 되어있었다.
헤파린 코팅을 하려면 헤파린병 입구를 소독하고, 헤파린을 채취하고 주사기병에 헤파린을 바른 뒤 헤파린을 버리고, 바늘을 교체하는 귀찮은 과정들이 필요하다.
실제로 국가고시 실기시험을 연습할 때는 이 순서대로 연습을 했고, 시험도 이런 방법으로 보았으나 역시 서울의 큰 대학병원은 달랐다.
ABGA 주사기
문제는 환자분들의 통증이다.
동맥에 주삿바늘을 찌르려면 그만큼 바늘이 깊이 들어가야 하고 그 정도와 비례해서 환자가 느끼는 고통이 커지게 된다.
주삿바늘을 찔러넣었을때 눈을 질끈 감은 환자분이 신음 소리 내셨는데, 그때 티는 안냈지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너무 아프게 찔렀나? 내가 뭘 실수했나? 어떡하지?'
고작 3cc의 피를 채혈하는 동안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아픈검사라고 말로만 들었었지 내 코앞에서 환자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 환자의 고통이 나에게까지 전이되는것만 같았다.
우선 심호흡을 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면 덩달아 환자분도 불안해할거라 생각하고, 아무일도 아닌것처럼 최대한 여유로운 척을 했다.
'환자분 많이 아프시죠? 바늘이 깊게들어가서 놀라셨을것 같아요. 이 검사가 원래 좀 아픈 검사예요~ 괜찮아요'
환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
그러자 환자의 신음소리는 멈추었고, 그틈을노려 재빠르게 검사를 마무리할수 있었다.
공감은 아픈것도 참을수 있게 하고, 화나던것도 가라앉히는 마법같은 행위라는것을 다시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ABGA처럼 아주 간단한 술기도 결국에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검사들이 사람에 의해 행해지고, 병원의 모든 일에는 사람 간의 소통이 필요했다.
의사국가고시를 준비하면서 PPI(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는데 왜그렇게 PPI를 강조했었는지 인턴으로 근무를 시작하니 진심으로 이해할수 있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대화할 때 공감을 잘해주는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느끼고 신뢰감을 갖는다.
공감이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쥐고 태어난 성격이 제각각인지라 모두가 공감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기에 학교에서 왜 그토록 모든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성향을 갖도록 강조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결국 다 선배 의사선생님들의 큰 뜻이 있었다.
PPI는 비단 우리나라 의사들에게만 중요한것이 아니다.
본과 4학년시절,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실습을 하며 가장 중요하다고 배운것이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였다.
실습 책임의사였던 Dr.Gabr는 의사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하고, 환자에게 의도치않게 피해를 입힐수있다고 말했다.
의사인생에 큰 타격을 줄수있는 소송이 말그대로 밥먹듯이 일어나는 미국에서 Dr. Gabr는 20년간 의사생활을 하며, 단한번도 소송을 당한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 비결이 단연코 환자와의 관계라고 강조했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자칫 수직관계처럼 보이지만, 멀리서보면 인간과 인간의 수평관계이다.
의사가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환자가 의사를 이해해주는 범위가 넓어지고, 그만큼 의사는 안전해진다.
즉 환자와의 관계(PPI)를 쌓는것은 의사 자신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시곗바늘이 새벽 2시를 가리킬 무렵,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입사한 이래로 잠에 푹 들었던 적이 거의 없었기에 기회만 된다면 금방이라도 골아떨어질수 있을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눈은 떠져있지만, 정신은 이미 침대에 눕기 일보 직전의 상태
글자를 읽어도 한자씩 천천히 읽어야 이해가 되는 그런 상태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언제 콜이 오려나.. '
오매불망 콜만을 기다리며 책상 앞에서 시간을 때운다.
차라리 환자에게 직접 처치를 하는 콜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도 잘 가고, 잠도 깨고, 무엇보다도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직관적으로 느껴지니까
콜을 기다리는건 마치 도착시간이 애매하게 잡혀있는 택배를 기다리는것과도 같다.
시간이 될 때는 당직을 같이하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한다.
서울에서 나고, 평생을 서울에서 지낸 나의 룸메이트는 서울 시내에 웬만한 맛집들은 꿰고 있다
위치별로, 분위기별로 분류해 놓은 소중한 맛집 데이터 베이스를 전수받는 이 시간이 어쩌면 내가 오늘 당직을 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뭔놈의 서울은 이렇게도 넓은지, 맛집과 맛집사이의 거리가 지하철로 1시간이 넘는곳도 있었다.
역시 서울은 서울인가?
당직을 하는 12시간 내내 엄청나게 바쁘지는 않다.
밤새 병원을 뛰어다니기보다는,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질 것을 대비하여 근무를 하는 느낌이다.
인턴 선배들은 콜이 없을때 조금씩 잠을 자두는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아직은 마음편하게 눈을 붙일수는 없을것 같다.
아직은 초짜인턴이기에 콜이 들어온 콜을 받자마자 처리해도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 콜이 동시에 들어왔을경우 어떤 콜을 빨리 처리해야 할지, 어떤 콜을 좀 더 늦게 처리해도 될지 감이 전혀 없다.
콜을 처리해 나가며 경험치를 쌓는 과정이 내게는 가장 필요힌 경험이다.
결국 의사도 병원이라는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한 톱니바퀴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환자의 치료'라는 공통의 목적으로 여러 직군이 모여있으며, 각자 타직종이 침범할 수 없는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겉에서 보았을 때는 '병원'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다들 비슷한 일들을 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본인의 자리에서 밤을 새워가며 각자의 역할을 해나가고 있고, 그 덕에 병원이라는 유기체가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