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매일같이 삶의 새싹과 낙엽을 마주하고 있다.
이번 달은 소아청소년과에서 근무하는 동시에 통합 당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연령층의 환자들을 만나고 있는중이다.
소아청소년과 신생아실에서는 태어난 지 만 하루가 채 안 된 아이들을 보고, 내과 병동에서 90세가 넘으신 환자분들을 본다.
워낙 다양한 연령대의 환자가 입원해있는 내과병동에서는 10대, 20대, 30대.. 모든 연령층의 환자를 하루에 모두 볼수있는 날도 있다.
분명 나에게도 있었겠지만 기억의 끄트머리에조차 남아있지 않은 나의 신생아 시절부터 지금껏 살아온 나날의 2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야 마주하게 될 90세의 내 모습까지
근래들어 내 사진을 수십장 업로드하면 나의 어렸을때 모습부터 늙었을때의 모습까지 그려주는 AI 어플들이 유행해서
병원에서 마주하는 환자들을 보며 내 인생의 처음과 끝을 상상해 보는 것은 입사 후 새롭게 생긴 나의 작은 취미 중 하나이다.
다양한 연령층의 다양한 환자들을 보다 보면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환자들이 있다.
신기하게도 이런 환자들은 비슷한 연령대를 갖고 있거나 비슷한 진단명을 갖고 있는 등 어느 정도 공통분모가 있었고, 나름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초등학교 입학 전, 6살 정도의 어린이들
아직 검사의 필요성을 이해해 주기보다는 본인의 불편함이 제일 중요한, 투정 부리는 게 익숙한 나이의 아이들이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힘이 세지기 때문에 검사 과정에서 상당히 애를 먹는다.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협조하게 만들지 않으면, 주위에 성인 3명이 붙어서 꽉 붙잡은 채로 검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매 순간이 전쟁이다.
특히 코로나 검사를 할 때가 제일 압권이다.
입을 벌려달라고 하면 입에 자물쇠를 찬 것처럼 볼에 힘줄이 보이도록 꽉 다물고 있다
손으로 벌려보려 해도 턱 힘든 어찌나 세었는지 열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입에 면봉을 넣는다 하더라도 면봉을 깨물고 버티는 바람에 혹시나 면봉이 부러져서 아이가 다칠까 봐 검사를 잠깐 멈추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이럴 때면 먼저 코 검사를 하고, 아이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를 틈타 입 검사를 하는 요령도 생겼다.
허나 문제는 코 검사가 몇 배는 더 어렵다는 데에 있다.
코는 머리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잘못하다간 크게 다칠 수가 있어서 정말 조심해서 검사하는 편이다.
어느 정도 힘이 생긴 이 나이 때 아이들은 면봉을 보자마자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악을 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버린다.
이럴 때면 간호사 선생님을 호출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머리를 꽉 잡아달라고 부탁드린다.
그렇게 해서 코에 면봉을 집어넣으면 손으로 면봉을 빼버린다.
또 이럴 때는 보호자분에게 부탁해서 온몸으로 팔을 잡아달라고 부탁드린다.
정말 공포영화에서 나올 것 같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이 아이에게는 온몸을 구속하고 억지로 코를 쑤시는 내가 천하의 악당으로 보이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짧은 전쟁을 치르고 나면 온 병동이 떠나가라 목을 놓아 울곤 하는데 단 3분만 지나면 언제 그랬는 듯 조용히 눈을 깜빡이고 있다. 이럴 거면 진작에 도와주면 얼마나 좋아..라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집어삼키며 또 다음 전쟁을 치르러 간다.
연세가 많으신 환자분들 가운데 검사 자체에 불만이 많으신 경우도 자주 있다.
아프기만 한 검사 왜 자꾸 하는지
어제도 피를 뽑았는데 왜 자꾸 뽑는지
괜히 비싼 검사 해서 돈만 많이 들게 하지는 않는지
피를 뽑아서 몸이 더 안 좋아진 거 같다니
치료가 효과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니
나열하자면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불만들을 토로하신다.
이런 경우를 많이 겪다 보니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의사인 걸 티 내는 것'이 효과가 꽤 좋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는 나이가 많으신 환자분들에게 무언가를 하러 갈 때마다 "안녕하세요 오늘 OOO 하러 온 의사 OOO입니다 "라고 말을 하고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신기할 정도로 수월하게 협조를 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앞서 말한 불만을 토로하시기 시작하더라도 "환자분 의사 말 잘 들으셔야 빨리 낫죠", "의사들이 생각했을 때 필요하기 때문에 피를 뽑는 거예요"라고 말씀드리면 곧바로 수긍하신다. 사실은 갓 태어난 생후 2주 신생의 사이지만, 마치 많은 경험이 있는 듯 여유로운 척, 능숙한 척 연기하는 것도 신생 의사의 덕목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나 이러한 방법조차 통하지 않는 환자분들도 있으니, 바로 섬망 환자분들이다.
주로 중환자실에 계시기 때문에 검사할 항목들도 꽤나 많은데, 술기를 할 때마다 여간 진땀을 빼는 게 아니다
섬망 환자분들은 L 튜브, 폴리 카테터, 라인 등등 몸에 삽입해 놓은 것들은 죄다 빼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환자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체 보호대를 이용한다.
위에 넣는 L 튜브는 뭐 그렇다 쳐도, 벌루닝이 되어있는 폴리 카테터를 힘으로 빼버리면 요도가 파열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고, 바늘을 빼버리면 출혈뿐만 아니라 뾰족한 바늘에 의한 2차 피해까지 입을 수 있기에, 신체 보호대는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모든 술기 중 가장 최악의 난이도는 섬망 환자에게 찍는 ECG (심전도)이다
ECG(심전도)는 보통 환자분들에게 찍는 것도 꽤 어려운 검사이다
V1부터 V6까지 제위치에 붙이고, 사지 전극을 연결하는 것까지는 의료진의 몫이지만 ECG(심전도)가 제대로 나오기 위해서는 환자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편안하게 몸에 힘을 빼고, 말을 하지 말고 가만히 팔다리를 떨어뜨린 채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도 정확한 EKG가 나올까 말 까인데, 쉴 새 없이 몸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지르는 환자에게서는 EKG가 제대로 나올 리가 만무하다.
신체 보호대로 묶여있어서 붙여놓은 전극들은 떼지 못하지만 몸을 계속 들썩거리고 소리를 지른다.
환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잡으면 "너네들 내가 고소할 거야!! 얼굴 다 봐놨어!!" 하고 협박을 일삼는다.
내가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환자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일방통행일 뿐
아직 수련이 부족하기에,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나곤 한다.
아무리 환자라고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비협조적이라니.. 이게 다 누구를 위한 일인데...
나긋나긋 타이르는 목소리가 점차 짜증으로 변해가고,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목청이 높아진다.
이런 경우는 과연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과연 답은 있는 걸까?
모든 환자분들이 잘 협조해 주셨으면 좋겠지만, 세상에 마음처럼만 되는 일이 없다는 건 지금껏 살아오면서 충분히 배워왔다.
의사가 된 이상 협조를 잘하든, 안 하든 내 손을 거쳐가야 할 환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이 쌓이면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
좋은 의사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