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하다'는 말이 익숙했다. 여행처럼 현실과 가까운 활동일수록 더더욱 그렇게 다가왔다. 이론이 실전이 되는 순간들에도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일까? 누군가에게 실전이었던 존재는 어딘가에서 이론이 되고, 어느 순간에 실전으로 돌아왔다. 그걸 깨달을 때마다 사람들의 눈빛에는 실전이 된 존재와 똑같은 무엇이 어른대고 있었다. 그 순간들을 담고자 카메라나 수첩 같은 도구들을 인간들은 만들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던 원본 그 자체만의 아우라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 해도.
그래서 이론을 레플리카와, 이론이 실전이 되는 순간을 클래식과 비슷하다 느낀 걸까. 이론은 그 이전에 있었던 존재와 현상을 누군가가 인식하고 해석했을 때 이론이라 불린다. 그걸 누군가가 확인했을 때의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그걸 왜 그렇게 부르는지에 대한 호기심 정도야 가지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 답을 찾느냐에 따른 차이만이 있을 뿐이고. 그중에서 그 답을 직접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나는 더 좋았다. 그런 사람들이 되고 싶었고. 그게 살아있는 교육이라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유가 있었다. 무엇 하나 억압하려는 태도도 없었고. 물론 자신들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몸만 가지고 떠나고 싶었다. 혼자만 가져도 괜찮을 지도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정도로 정확할 필요가 없는, 그렇기에 어떻게 표현해도 자유로울 것 같은 지도. 『불타버린 지도』(燃えつきた地道, 아베 코보 저, 문학동네, 2013)의 도입부를 떠올릴 때면 더더욱 그랬다.
도시. 닫힌 무한. 결코 헤매는 일 없는 미로. 모든 구획에 똑같은 번지가 매겨진 너만의 지도. 때문에 너는 길을 잃더라도 헤맬 수는 없다.
도입부만 생각하면 이 지도의 범위를 도시에만 국한하려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도시의 느낌은 그랬으니까. 네온사인이나 화려함에 묻혀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뿐. 물론 도시가 이런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자주 하고 있음은 알고 있다. 자연과의 공존이나 탄소 중립 등등. 인프라 구조도 마찬가지다. 코엑스마곡이나 수원컨벤션센터처럼 아예 지하서부터 모든 것들을 이은 경우도 있다. 그런 곳들을 볼 때마다 항상 신기해했고. 수원컨벤션센터의 경우는 이제 지하연계로 갈 계획이지만.
그럼에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생각은 있었다. 여전히 도시는 도시라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집 앞 공원이나 산책로를 거닐면 잠깐은 그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야 있다. 도심에서 볼 일이 없는 동식물들 때문에. 꿩이나 개구리, 딱따구리 등등……. 그러나 형태가 있는 것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일까? 다들 한 걸음 다가가면 육체적 혹은 심적으로 몇 걸음 이상은 거리를 두었다. 밟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손길을 내밀었을 때에도.
외로움이 익숙한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마다 느꼈던 속상함이 담담함으로 바뀐 순간부터는 더더욱. 이런, 고요한 낯섦이 없는 곳에서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일까? 생물들의 서식지에 속해 있으나 무조건 속해있다고도 할 수 없는 미묘함을 느낄 때마다 나라는 존재를 느꼈다. 자체의 살아있음을 그렇기에 더더욱 바라보고 싶었고. 그 길을 걷다 보면 이런 식의 만남도 있는 것이리라. 세세하게 따지면 동일한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전거 여행자라는 범주에는 속하니까.
이 순간에도 그랬다. 자전거로 제주도는 처음이라, 같은 여행자에게 상세하게 뭘 알려줄 수는 없었다. 잘못 알려줬다가 타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남은 여행이 찝찝할 것만 같았기에 더더욱. 물론 중간에 어딘가로 빠지거나 할 수도 있다. 그냥 모른다면서 혼자 가는 것도 괜찮고. 어차피 외로운 여행이니 그냥 이래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근데…… 그렇게 떠나면 그것대로 찝찝함이 남을 것만 같았다. 나답지도 않고. 언젠가 외로움을 느낀다 해도 지금은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게, 외로운 사람은 외롭지 않게 된다. 당분간은. 그 당분간이라는 말이 싫지는 않다. 가끔은 당분간이라는 말이 얼마나 가야 맞는지를 알고 싶을 때도 있다. 자유라는 말을 사랑하는 사람들 또한 자유의 뒷면과 기저에는 이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리라.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다들 지금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다 생각하고.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작에 우리의 창조물에게 자리를 뺏기지 않았을까? 하루하루 어떤 느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물을 여유도 없이.
물론 영원해야 할 것들도 있다. 이상을 갈망하는 태도나 도전하는 자세 등등. 이들을 구분하는 시선 또한 중요하다. 모두 다 같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정체될 뿐이니까. 그걸 구분하는 일이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방금 언급했던 태도와 자세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으니까. 과거의 이상은 영원한 이상이 될 수 없기에, 도전하는 자세는 어디에 도전한다는 사실이 그대로이기에 영원하다. 지금 당장 보기에는 변화무쌍할지 몰라도. 그렇기에 지금은 페달을 밟을 뿐이다. 같은 여행자 한 사람과 함께. 걷다 보면, 언젠가는 변하는 것과 변치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