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 속 신화, 춤추는 한국문화 20
나는 시골에서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낳기 위해 계속 딸을 낳은 이야기가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 있다. 그래서 어릴 적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바로 바리데기였다. 아무 잘못도 없이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다는 잔혹한 이야기가 어린 시절 내게는 참 불편한 서사였다. 한국에는 바리데기를 떠올리게 하는 수많은 집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고 실제로 버려졌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아들을 원하던 가부장제의 욕망이 오랫동안 가족의 내면을 지배해왔다는 의미다. 바리데기의 이야기는 바로 그 억압된 세계에서 태어난 신화였다.
그러나 운명은 언제나 아이러니하다. 일곱째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바리에게 다소 부당하고 양심없는 임무가 주어진다. 아픈 부모를 살리기 위해 저승에 가서 생명수를 구해오라는 것이다. 나는 어릴 적 그 이야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왜 부모의 병을 고치는 일이 바리의 몫이어야 할까? 왜 세상은 늘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움직이는가? 그러나 나이가 들고 공부를 하며 알게 되었다. 바리데기의 여정은 단순한 효의 서사가 아니라, 죽음과 상처를 통과해 생명을 되살리는 치유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버림받은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역설 속에서, 여성 신화의 가장 강력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었다.
현대 소설가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이 신화를 현대적으로 되살려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탈북 소녀 바리를 주인공으로 하여 분단과 전쟁, 난민의 삶을 넘어 이주와 상처,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묻는다.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려진 바리는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떠돌며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구하고 스스로 치유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황석영은 이 작품을 통해 전통 신화의 ‘죽음과 재생’ 구조를 현대의 현실로 옮겨와, 여성의 생명력과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새롭게 탐구했다. 『바리데기』의 바리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며 타인을 살리고 스스로를 되살리는 디아스포라적 존재로, 신화와 현실을 잇는 현대적 무녀(巫女)로 변모한다.
이처럼 바리데기의 서사는 시대를 건너며 끊임없이 새로 태어난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POP 데몬 헌터스〉 속 그룹 헌트릭스(Huntrix)는 바리데기의 후예처럼 보인다. 그들은 단순한 아이돌이 아니라 먼 과거로 부터 이어진 무속의 후계자로 설정된 현대의 샤먼 그룹이다. 무대 위에서 춤과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는 그들의 퍼포먼스는 전통 굿의 장단과 에너지를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린다. 음악의 비트와 조명이 교차하는 순간, 무속의 굿은 새로운 형태의 공연 예술로 변모한다. 헌트릭스는 단지 싸우는 전사가 아니라, 상처 입은 도시의 영혼을 달래는 ‘디지털 오구신’으로 재탄생한 존재들이다.
헌트릭스의 세계관은 판타지적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문화적 맥락이 숨어 있다. 그들은 굿의 정화 의식을 이어받아 음악과 영상의 언어로 인간의 어둠을 치유한다. 무속의 리듬은 걸그룹의 리듬으로, 주문은 노랫말로, 신의 언어는 팬들의 응원 속에서 다시 울린다. 바리데기가 저승의 강을 건너 생명을 구했다면, 헌트릭스는 무대의 어둠 속에서 마음의 불빛을 켠다. 두 세계의 거리는 멀지만, 그 근원은 같다. 고통을 통과해 타인을 구하는 여성의 리듬, 그것이 바로 한반도 신화가 간직한 치유의 상상력이다.
바리데기는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상처 입은 존재의 은유다. 헌트릭스 또한 그 신화의 현재형이다. 그들의 노래는 굿의 후렴처럼,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되살리는 주문이 된다. 나는 헌트릭스의 무대를 볼 때마다 바리데기의 영혼을 떠올린다. 버려졌던 존재가 신이 되고, 상처가 생명을 여는 문이 되는 순간, 신화는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신화의 무대는 이제 무당의 굿판이 아니라, K-POP의 스테이지 위에 있다. 신화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