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케데헌> 속 북촌, 시간을 짓는 사람–정세권

케데헌 속 신화, 춤추는 한국문화 19

<북촌 한옥 마을 사진을 챗지피티를 활용해 밤으로 변형시킴>




35년 전, 대학 시절 배낭 하나 메고 유럽을 여행했다. 런던의 템즈강변에는 셰익스피어가, 오스트리아 빈 광장에는 모차르트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단순한 기념비가 아니라 도시를 움직이는 생명선이었다. 연극이 거리의 느낌을 살리고, 음악이 광장을 숨 쉬게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문화가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것을 보고 느꼈다. 그 부러움은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영문학을 전공하던 나는 남의 언어로 세상을 읽기보다 우리말로 세계를 다시 쓰고 싶었다. 그 후 나는 한국 문화의 언저리에서 신화와 문화와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요즘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헌터스〉 속 루미가 걷는 서울의 풍경에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전통의 지붕과 현대의 빛이 교차하는 그 무대 한가운데, 세계인들이 몰려드는 곳이 있다. 바로 북촌 한옥마을이다. 한옥의 처마 아래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의 전통과 현대를 동시에 경험한다. 기와의 우아한 곡선과 유리창의 빛이 뒤섞이고, 예쁜 한복을 입은 여자와 저승사자의 도포와 갓을 쓴 여행자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골목의 그림자를 분주하게 담는다. 나는 35년 전 유럽에서 느꼈던 문화적 부러움이 이제 우리 땅에서도 실현되고 있는 기적을 보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는 서울의 북촌은 저절로 생겨난 마을이 아니다. 100년 전, 한 건축가의 신념이 그 골목의 벽돌과 마루에 새겨져 있다. 그의 이름은 정세권이다. 그는 일본식 건물이 경성을 잠식하던 시절, 조선인의 집은 조선인의 손으로 지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건양사를 세우고 북촌 일대에 수백 채의 한옥을 지었다. 당시 남촌 지역에는 일본인 거주지가 빠르게 확장되고 있었고, 그들은 북촌으로까지 진출하려 했다. 정세권은 이 움직임을 막기 위해 북촌을 조선인의 거주 공간으로 계획했다. 그의 한옥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식민도시의 경계선을 지키는 공간적 저항이었다. 이때 돈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전세와 월세의 개념이 들어간 주택이 분양되었다는 점이 인상 깊게 보였다.

정세권의 한옥은 전통가옥의 단아함에 근대적 합리성이 더해진 도시형 한옥이었다. 좁은 도심의 대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그는 ㄷ자형과 ㅁ자형 구조를 도입했다. ㄷ자형 마당은 햇살과 바람이 드나드는 열린 공간을 만들었고, ㅁ자형 배치는 가족의 사생활과 공동체의 친밀함을 동시에 지켰다. 매년 찾는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 생가도 바로 ㅁ자형이었는데, 그 아늑함이 새삼 느껴졌다. 마당은 작지만 동선은 치밀했고, 안채와 사랑채, 부엌과 마루가 하나의 생활 단위로 이어졌다. 그는 한 필지를 분할하여 여러 세대가 살 수 있도록 설계하며, 도시 속에서도 이웃이 연결된 주거 문화를 만들었다. 그의 한옥은 단정한 미감과 실용적 설계가 공존하는 생활의 건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해 가던 정세권의 꿈은 일제의 눈에 매우 거슬렸던 것 같다. 한옥 건축으로 얻은 수익을 조선어학회에 기부하고, 우리말 사전 편찬을 위해 회관을 지어준 일이 문제가 되었다. 1942년,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했다. 사업 면허까지 박탈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한글사전 편찬을 지원했다. 정세권에게 한옥은 건축이 아니라 문화의 방파제, 그리고 우리말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걷는 북촌의 골목에는 그의 건축 철학이 여전히 살아 있다. ㄷ자형 마당과 ㅁ자형 지붕 아래에는 전통의 질서와 근대의 합리가 공존한다. 좁은 골목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는 백 년 전 한 건축가가 꿈꾸었던 도시의 표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남촌으로부터 밀려오던 식민의 그림자를 북촌의 한옥으로 막아낸 정세권의 의지는, 지금도 그 기와 사이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제 북촌은 과거의 유산을 넘어, 세계로 열린 무대가 되었다. 드라마 〈도깨비〉와 영화 〈암살〉 등 수많은 한류 드라마와 영화들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고 있으며, 한옥은 다시금 한류의 무대가 되었다. 배우들이 걷는 돌담길은 정세권이 설계한 길이고, 카메라가 비추는 처마는 조선의 시간 위에 서 있다. 백 년 전 그가 남긴 도시의 상상력은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의 무대가 된 것이다.

정세권이 한옥을 지을 때 품었던 믿음. “우리의 집은 우리 손으로 짓는다”는 그의 말은

<케데헌>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 문화로 전한다는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한옥은 더 이상 과거의 건축이 아니라 미래의 콘텐츠가 되었다. 정세권의 집들이 세운 골목 위 둥근 달빛 아래에서, 한국의 문화는 지금 새로운 시간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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