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로와 허황옥을 생각하며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지봉
1. 다시 가야를 읽는다.
AI 시대에 왜 굳이 『삼국유사』 속 가락국기일까, 처음엔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졌다. 기록은 단 한 편, 가야를 말해주는 거의 유일한 서사. 하지만 그 짧은 기록 안에는 지금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고민해야 할 가치들이 촘촘히 숨어 있었다. 1300년 전 일연 스님은 먼 후세를 위해 이 이야기를 담아놓은 것일까.
가락국기는 영웅의 정복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김수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존재이지만, 그는 백성을 지배하는 왕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철을 독점하지 않고, 농업과 어업,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며 공존을 선택한다. 백성들은 왕과 왕비를 해와 달처럼 귀하게 여겼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시대에, 가락국기는 기술보다 앞서는 윤리를 먼저 묻는다.
“강한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수로와 허황옥
2. 오직 꿈만을 믿고 머나먼 항해를 떠나온 허황옥.
나는 매번 허황옥이라는 인물이 나오는 대목에서 숨을 고른다. 바다를 건너온 여성, 왕에게 선택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이동한 주체. 험난한 항해는 로맨스가 아니라 생존의 결단이었다. 그녀의 여정은 사랑을 찾아온 공주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를 품고 이동한 존재의 서사 자체이다. 불교적 상징, 장신구, 의례, 그리고 다른 세계의 감각이 가야에 스며드는 순간, 가락국기는 ‘문화의 이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집의 구조가 바뀌고, 의례가 바뀌고, 이름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이후다. 허황옥의 일부 자식들에게 ‘허’씨라는 성을 준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가계 문제가 아니다. 여성의 혈통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기록, 고대사에서 매우 드문 장면이다. 최초의 호주제가 실현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학생들과 이 대목을 읽을 때, 교실의 공기가 달라졌다. “교수님, 이건 거의 여성 평등 선언 아닌가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래서 학생들은 허황옥이라는 인물에 매료되는 것 같다. 가야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혈통도, 권력도, 성별로만 규정되지 않는다고.
3. 가락 즉 물고기가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
한 팀은 ‘가락’이라는 이름에 주목했다. 가락국의 ‘가락’은 물고기를 지칭한 것이다. 물고기는 머무르지 않는다. 강을 거슬러 오르고, 바다를 건너 이동한다. 학생들은 가야를 고정된 국가가 아니라, 이동하는 문명으로 읽었다. 김수로는 정착의 상징이고, 허황옥은 이동의 상징이며, 그 둘을 잇는 매개가 바로 가락, 물고기라는 해석이었다. 나는 그 발표를 보며 오래된 텍스트가 이렇게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메타버스 코스페이시스 안에서 물고기 가락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우륵도 만나고, 철 문화도 만나고,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도 만난다. 그리고 배를 타고 온 허황옥도 마중한다.
또 다른 팀은 허황옥을 ‘따라온 공주’가 아니라, 자리를 찾아간 여성으로 재해석했다. 배를 탄다는 것은 보호받는 선택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이다. 학생들은 허황옥을 오늘의 청년 여성과 겹쳐 보았다. 국경을 넘는 유학생, 새로운 언어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동하는 존재들. AI 시대의 이동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정체성과 역할의 이동이라는 점까지 짚어냈다.
4. 가락국기는 과거의 작은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존의 정치, 이동의 윤리, 여성 주체성의 기억을 품은 메타 텍스트다. 그리고 AI 시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 묻는 오래된 질문이기도 하다.
기록은 하나뿐이지만, 해석은 끝이 없다.
가야는 사라진 나라가 아니라, 어쩌면 지금도 계속 읽히며 이동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주체는, 오늘의 학생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