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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노리는 것

공급망 재구축과 마러라고 합의

by 노진호

작년 6월경 “1974년 6월 8일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를 달러화로만 결제하고 석유 판매대금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겠다는 협정을 미국 정부와 맺었는데, 이 협정이 더 이상 갱신되지 않고 50년 만에 폐기된다”는 기사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기사의 신뢰할 만한 출처는 찾을 수 없었다. 뉴스 이후 글로벌 달러화는 잠시 약세를 보였다가 다시 강세로 돌아섰다. 금융시장에서는 더 큰 바보(the greater fool)를 만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작전 세력들이 많다. 그런 신념을 가진 누군가가 만들어 퍼뜨린 가짜 뉴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페트로달러란 산유국이 원유를 수출함으로써 보유하게 된 달러 표시의 자금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원유가 달러화로 결제되기 때문에 오일머니(oil money)와 페트로달러는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가 됐다. 그런데 왜 사우디를 포함한 많은 산유국들은 원유를 팔 때 달러화로 결제할 것을 요구할까? 오랫동안 미국의 메이저 정유사가 산유국의 원유 개발과 거래를 주도했고, 달러화 기준으로 거래되는 미국의 원유 선물시장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가설이 유력하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석유 소비시장이라는 점도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페트로달러’와 관련한 가짜 뉴스―미국-사우디 협약설―에 휘둘린 것은 ‘기축(key)통화’와 ‘보유(reserve)할 만한 통화’가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사우디에 모종의 압력을 넣어 석유를 달러화로 결제하도록 유도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달러화의 가치가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사우디는 석유를 팔아 얻은 달러화를 유로화나 엔화, 금 등으로 바꿔야 한다. 사우디가 달러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50년간 국익을 버리면서까지 미국에 굴종할 이유는 없다.

최근 러시아는 국제 무역시장에서 루블화 결제를 요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이 해외에 있는 러시아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는 바람에 달러화 자산이 당장 무용(無用)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러시아산 원유나 농산물을 구매하는 기업이라면 외환시장에서 루블화를 먼저 구해야 한다. 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무역에 필요한 규모 이상으로 루블화를 보유하지는 않는다. 루블화의 보유 가치가 낮아서, 즉 루블화 보유의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EU 위원회와 중국 정부는 각각 유로화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펼쳐 왔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IMF 통계와 BIS 자료를 보면, 국제결제시장과 각국 외환보유고(foreign exchange reserves)에서 차지하는 유로화와 위안화의 비중은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달러화는 다르다. 달러화는 기축통화이면서 각국 외환보유(reserves)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미국은 경제 자유도가 높고 선진국치고는 성장률도 높은 나라다. 금융소비자 보호도 엄격하다. 분식회계를 하거나 주가 조작을 하면 종신형을 살 수도 있다. 미국의 자산, 즉 주식, 채권, 부동산은 꽤 안전하다.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면 많은 사람들이 저렴해진 미국 자산을 사겠다고 모여든다. 사우디의 도움 같은 것은 필요가 없다. 유럽과 중국은 갈 길이 멀다.

따라서 미국은 보유 가치 높은 기축통화를 국채 발행 등의 방법으로 공짜로 찍어내서 세계의 값싸고 좋은 물건을 쉽게 얻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달러화의 보유 가치가 높아지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를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가진 미국의 산업 경쟁력 약화와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 게다가 미국을 상대로 물건을 만들어 파는 중국이 거대해지면서 위협을 느낀다.

정리해 보자. 루블화와 위안화, 유로화 등은 물건을 파는 기업이 속한 국가의 요구에 의해 일정한 무역 공동체 내에서 지역적인 기축통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규제나 생산성 등 다양한 경제적 요인과 “많은 나라들이 원하는” 순환론적 요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보유 가치 있는 통화로 발전하기는 어렵다.

한때 금 보관증(gold smith’s note)이었던 달러화는 이제 강력한 보유가치를 지닌 종이돈(paper money)이 되었다.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 종이돈의 장점은 계속 누리면서 단점(산업생태계 훼손과 일자리 악화)은 버리는 전략을 취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1단계는 상호관세 등을 활용해 미국 내 투자를 유도함으로써 산업생태계 회복을 추진하려 할 것이고, 2단계는 제2의 플라자 합의(즉, Mar-a-Lago Accord)를 통해 달러화의 약세를 유도하면서 무역수지 적자도 축소하려 할 것이다. 필자의 추측 내지 억측이지만, 그 다음 단계는 비트코인 중심의 고정환율제도를 채택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 기축통화의 혜택은 누리고 유지비용은 다른 나라에 전가하는 전략이다. 비트코인을 전략 자산으로 비축하겠다는 트럼프라면, 아니 트럼프 배후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유지하고 싶어하는 우파 엘리트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3단계는 말도 안 되는 전략일 수 있지만, 미국이 만든 질서를 따를 수밖에 없는 세상이 온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추신) 트럼프 얘기는 위 밑줄 친 가설과 관련해 의미 있는 뉴스가 생길 때만 간헐적으로 올리고, 다음 회부터는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 즉 (비트코인과 구별될 수 있는) 돈이란 무엇인가, 트럼프식 보호무역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등에 대한 것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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