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이민부 (Immigration Department) 산하의 조사과 (Investigation Division)의 조사는 치밀하고 집요했다. 내개 취업비자 없이 5개월 간 교사로서 근무했다는 '이민법 위반 불법취업 혐의'를 바탕으로 홍콩 입국의 과정과 교사 자격에 대해 빠짐없이 점검했다. 이틀에 걸쳐 12시간 동안 지난 5개월간의 행적을 낱낱이 확인했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뒤에 위 혐의 사실이 '해당 사항 없음'이라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이 일로 마음고생이 많았는지 그날은 호된 몸살을 앓았다.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큰 영향을 미쳤던 계기가 있었다. “개미의 생태”에 관한 글을 읽던 중에 나는 한 구절에서 잠시 멈췄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부지런한 개미의 일생 동안의 행동반경이 고작 수 백 미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고등 동물일수록 서식지의 환경과 거리에 자발적인 변화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정보는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책을 덮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서식지의 행동반경이 고등과 하등을 구분하는 지배적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 단순하고 명쾌한 추론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대상을 순식간에 구획 지을 수 있는 잣대로 작용했다.
우화에 등장하는 개미는 일생동안 고작 수 백 미터의 행동반경을 오가는 선천적으로 세뇌된 하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수 천 킬로미터를 오가는 연어나 철새의 큰 행동반경은 장기간 지속되거나 반복되지 않는 단순한 본능적 순환이기 때문에 고등 동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어떤 궤적을 그리며 살아왔는지 반문해 봤다. 지도를 꺼내서 유년시절부터 거쳐온 기억을 떠올리며 내 삶의 궤적을 그려보았다. 부산에서 군복무를 한 기간 빼고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 서식 반경은 기껏해야 수 십 킬로미터에 불과했다. "개미의 생태"에서 말한 논리에 따르면 난 영락없이 하등 개미인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 기로 했다. 선택한 첫 번째 서식지가 중국 천진이었다.
천진한국국제학교에서의 1년은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고 교사로서의 보람과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불가피한 일로 그곳을 떠났지만 내 삶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여행사 프로그램을 선택해서 단체로 스쳐가듯 구경하는 여행 일정은 철새가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짧은 중국 생활 동안 여행을 많이 했다. 나는 모든 여행 일정을 혼자 계획하고 지도에 매직으로 표를 그려 가면서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했다.
지난 10월 중국의 국경절에 중국의 '북경-상해-소주-항주-홍콩'을 돌아보는 여행 계획을 짜고 일정에 따라 흥미진진한 여행을 했다. 중국어로 간신히 의사소통만 가능한 내가 가족을 데리고 약 열흘 간의 모든 일정을 혼자 짜서 다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만해도 인터넷이 거의 활성화되지 않아서 교통편과 숙소의 예약을 하는 일이 힘들었다. 예약을 해도 현장에 도착하면 취소되거나 예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늘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야 했고, 임기응변을 발휘해서 다음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언어가 안 되는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나갔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지'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다.
그 여행의 마지막 장소였던 홍콩을 보고 나는 한눈에 반했다. 이 작은 도시에서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 과거와 현재의 문화와 역사와 경제가 공존했고, 동서의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이곳에서 잘 배우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홍콩한국국제 교사로 이곳에 왔다.
홍콩한국국제학교는 홍콩의 주거 중심지에 있다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서식 환경을 갖고 있었다. 엘빈토플러가 말한,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 지식이 권력 이동의 중심축이라는 지적에 방점을 맞춰보자. 그 지식의 핵심은 능통한 어학 능력과 국제적 감각, 정보 운용능력 그리고 한 분야에 대한 전문가적 소양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관점에서 보면 홍콩은 한 개체의 행동반경을 어느 곳에서나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확장시킬 수 있는 천혜의 서식 환경을 가졌다. 이곳에서 제대로 준비된 학생들은 자신의 노력 여부에 따라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존재로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곳 홍콩한국국제학교에서 모국어와 영어, 중국어를 배우고 국제적 감각과 정보 운용 능력을 제대로 갖춘 학생이라면, 변화하는 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해 갈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자신의 행동반경을 확장할 수 있는 고등 개체로서 제 역할을 잘 해내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홍콩은 천혜의 서식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