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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례자 Jul 12. 2024

22 T시의 절벽 위에 서다!(1/3)

     학교를 떠날 위기를 만나다.

  홍콩 여행을 마치고 T시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T시 상공에 가까워지자 파란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큰 우산을 펼친 듯 검고 넓은 장막이 T시 위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공해와 먼지가 두껍게 층을 이루고 넓게 펼쳐져 있는 하늘은 처음 T시에 왔을 때  보았던 그 회색빛 도시 그대로였다. 그래도 학교를 생각하면 새로운 기운이 솟았다. 밝고 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쟁쟁하게 귓가에 울려 가만히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짓게 했다.

  오랜만에 학교에 들렀다. 행정실에서 월급 명세서를 받았다. 세금을 공제한 수령액 9000위안(한화로 1,100,000 정도, 120원/1위안)이 찍혀있었다. 월세 2800 위안은 집세 보조비로 내손을 거치지 않고 행정실에서 집주인에게 직접 전달된다. 물론 당시 중국 대졸 은행원의 월급이 2,500~3,000 위안, 이웃 학교 교장이 4,500~ 5,000위안 정도라고 하니  적게 받는  월급이 아니라고도 할수 있겠다. 하지만. 한국인이 중국인처럼 살기는 여러가지 여건상 현실적으로 어렵다.10여 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통장은 텅 비었다. 월급을 받을 때마다 생각한다. 국어, 영어, 수학 과목 교사들은 방과후 수업이 있어서 그나마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지만, 다른 과목 선생님들은 이 빠듯한 살림살이를 어떻게 유지할까? 환경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야 한다. 새로운 마음으로 2학기에  열심히 일하고 또 자금을 마련해서 겨울 방학에 또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나는 아이가 하나이고 또 어려서 중국어와 악기를 배우는 것 외에 과외비가 더 들지 않는다. 다른 주재원 한국인들을 부러워하거나 그들의 흉내만 안내면 그래도 살만하다. 가령,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비싼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살고, 주말마다 외식 하고, 필드로 골프 치러 가고,  주요 과목 과외를 붙이는 일이다. 이 모든 일에서 일찌감치 신경을 끄면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 단, 아이와 아내가 그런 친구들 집에 놀러 가지만 않으면 몸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T시의 P 교장은 오랜 교직 생활에서 내가 만난 가장 훌륭한 리더이다.  약간 큰 키에 반듯한 골격과 체격을 갖춘 그는 늘 검정 벨트를 한 회색빛 양복바지에 흰색 계통의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입고 검은 정장 구두를 신었다. 걸음걸이와 행동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절제된 행동에 예절을 갖추고, 시원스럽게 말하고,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 붉은빛이 도는 갸름하고 약한 창백한듯한 흰 얼굴에 반백의 직모인 P 교장은 선비 같은 모습을 지녔다.

   그는 상대와 얘기할 때 사려 깊은 표정으로 침착하게 상대의 눈을 바라봤고, 언어는 명쾌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서울 모 고등학교의 면접장에서였다.  2000년대 초반 한국에서의 일탈을 시도했던 나는, 세 나라를 지원했고 그중 두 나라의 서류 전형에 통과해서, 첫 번째 T시의 면접을 치렀다.

  긴 면접 시간의 말미에서 P교장은


   "우리 학교 현황과 월급여에 대해서 충분히 얘기 들었지요? 해외 생활이 녹록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자 그러면 우리 다시 만납시다."


라고하고 환하게 웃었다.


   면접 경쟁률이 3대 1이었고 당시 함께 면접 본 사람들이 EBS 강사, 모의고사, 수능 출제 경력 등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상대적으로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나는 그 말을 반신반의했다. 그래서 다음 V국의 면접을 준비했다. 운 좋게 두 곳에 모두 합격했고, 나는 T시를 최종 선택했다. 아마도 당시 해외특례전형의 최상위 대학 입시가 논술이어서 내게 기회가 왔던 것 같다.


   이듬해 2월 13일에 나는 T시에 입국했다. 새 학기가 시작됐고 나는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여러 면에서 했다. 관리자로서 P교장은  훌륭했다. 매일 아침 정문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아이들이 학교 오는 것이 즐거워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매일 아침 등교하는 아이들을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는 것으로  실천했다.

   또한 P교장은 학교에서 교사들이 즐거워야 아이들에게 잘할 수 있다고 했다. 학사 일정이나 교수 학습에 대해서는 깐깐했지만 개인적인 감정으로 짜증을 내는 일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존대와 반말을 적당히 섞어 쓰며 권위와 친밀감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모든 교직원들과 회식하는 일을 정례화했다. 행정실장 말로는 자신의 판공비를 모두 이곳에 쓰는 것이라 했다. T시에는 규모가 큰 음식점이 많았다. 4층 건물에 한 방에 20~30여 명이 들어갈 만한 방이 많았다. 서빙하는 사람들이 로울러 스케이트를 타고 다닐 만큼 규모가 컸다. 사방이 흰색과 황금색으로 장식된 화려한 큰 방 안에서 크고 둥근 중국식 원형 테이블에 초중등 교직원이 빙 둘러앉으면,  교장은 모두에게 백주를 한 잔씩 돌리고  나서 "이번 한 달도 열심히 사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재밌게 지냅시다."라고 건배사를 한다. 회식 자리에서는 좀처럼 학교 얘기를 하는 법이 없다. 스스로를 두주불사 라고 할 만큼 백주를 좋아했지만, 과하게 말하거나 과장된 감정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 술을 못하는 나도 늘 회식에 참여했고 모임의 끝은 즐거웠다.


    P 교장의 인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 터졌다. 학교뿐 아니라 T시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킨 그 사건으로 두 사람의 교사가 T시를 떠나게 됐다. 그중에 한 사람이 나다.


   사건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날에 우연히 터졌다.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후, 10월 중순경이었다.  교무실에 있다가 유리창이 깨지고 의자가 나둥그러지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 나는 복도로 뛰어나왔다. 복도에는 세 사람이 날 선 눈빛과 극도의 긴장 상태로 서 있었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학생부를 맡았던 나는 학생들을 교실로 들여보내고 주변을 수습한 후에 교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사건의 당사자는 P 여선생님과 중3 남학생 L 군 그리고 교부무장 S선생이었다. 수업 중에 책상 밑에서 몰래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던 L학생을 P 선생이 못하게 하자, P군은 이내 엎드려 잤고, 자는 것을 깨우는 P 선생에게  책상을 걷어차며  욕설을 하며  대들었다. 옆반에서 수업을 하던  교무부장 S 선생이 이 소동을 듣고 그 교실에 들어갔고, 꾸중을 하는 중에도 난동이 계속되자  L군의 뺨을 때렸고, L군이 복도 유리창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진 것이다.

    L군은 지난 주말에도 이웃 국제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해서 학생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L군은 돌격대장 스타일의 아이였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다니며 어깨에 힘을 주고 몰려다니며 힘을 과시하는 그런 류의 아이로, 학교 내에서는 그다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일련의 상황을 정리해서 P 교장에게 보고 했고, 징계위원회에서 L군에게 5일 유기정학이 내려졌다. 사건이 이 정도에서 일단락이 되는 줄 알았다.  L 군의 유기정학이 통보된 다음 날, L군의 부모가 학생부에 찾아왔다. 들어오는 순간부터 찬바람이 쌩쌩했다. L 군의 부모는 분노에 차서 목소리 마저 떨렸다.


    "그래 우리 아이는 그렇다고 칩시다. 우리 얘를 때린 그 선생은 어떻게 할꺼요?"

    "모든 정황을 충분히 살펴서 K 군이 충분히 반성할 수 있도록 배려한 징계입니다."


     L군의 부모는 애초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길길이 뛰다 갔다.


   다음 날 L 군의 아버지는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와서 교무부장 S선생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상담실에 S선생과 L군의 아버지가 앉았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기록을 했다. 상담실 밖 복도에는 L군의 아버지가 데리고 온 남자들이 서 있었다.  S교무부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하참~. 애초부터 일이 이렇게 커질 것이라 생각 안 했습니다. 우리는 K군이 누구보다 잘 되기를 바라고 교육하는 것이니 그만 노여움을 푸세요. 이후에도 K군이 학교에 잘 적응하도록 우리가 도울 것입니다.”

   “뭐라고요? 아니 남의 금쪽같은 새끼 뺨 떼기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는 5일 정학을 준 것이 아이를 위한 일이라고요? 우리 아이의 미래는요? 이제 다 망했어요. 당신도 똑 같이 한번 당해 보시오. 우리 아이와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처벌도 돌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나도 끝장을 볼 겁니다.”


   그는 험한 표정을 짓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가 격해지고 S선생과 L군의 아버지는 언성이 높아지다가 급기야는 서로 멱살 잡이를 하고 떠다밀며 실랑이를 했다. 상담실 책장의 유리까지 깨질 만큼 격한 몸싸움이 이어졌다. 곁에서 말리던 나는 K군의 아버지를 향해


   “이게 상담을 하러 온 학부모의 태돕니까? 깡패나 하는 짓이지 협박하려면 학교에 뭐 하러 왔습니까? 본인멋대로 행동하는게 처벌받은 학부모가 할 일입니까?”


    목소리를 높였고, 밖에 섰던 남자들이 상담실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나는 아차싶어 서둘러 사태를 진정시키고 L군의 아버지와 일행을 간신히 달래서 돌려보냈다.


   다음 주 T시 지역 한인 신문에  'T 한국학교 폭력 교사들의 추악한 실태'라는 제하의 칼럼에, 교사들이 작당해서 힘없는 학생을 비행, 폭력 청소년으로 매도했고, 상담으로 찾아간 부모에게도 폭력을 행사했다고 실었다.  L군의 아버지는 학운위 위원장이었고, 지역 한인신문 대표였고, 호텔, 음식점 등을 경영하는 한인 상공회 간부이기도 했다.


   이 사건이 터지기 이전까지  L 군의 아버지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교양은 좀 부족했지만,  솔직하고 화통한 화법과 성격으로 선생님들의 말에 귀기울이는 후원자였다. 학교 체육대회 등의 행사에 음료수와 간식을 준비해주는가 하면, 기념일에는 전체 회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의 두 아들이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장남이었던 L군의 이번 사건으로 그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의 표정과 태도가 완전히 돌변했다. 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거칠게 말했다.       


   이 사건의 파장은 우리 학교뿐 아니라 T시 한인 사회에 들불처럼 확산됐고, L군의 아버지는 아이의 뺨을 때린 S교사의 파면을 거론했고, 옆에서 그의 심기를 건드린 나 역시 ‘학부모에게 무한 교사’로서 징계를 요청하는 연서에 주변 사람들의 서명을 받아서 학교장에 제츨하고, 한국의 교육부에 탄원까지 했다. 학교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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