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전에 생각했나요?

- 물건과의 이별 ② 만남을 시작하기 전에

by 차슈

기우(杞憂)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예상하고 걱정하는 모습, 즉 쓸데없는 걱정을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다. 중국 춘추시대 때 존재하던 소국들 중 하나인 기나라 사람이 하늘과 땅이 무너질까 걱정되어 일상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유래된 표현인데 전생이 있다면 내가 그 고사 속 주인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에 대한 걱정보다는 물건이 모자랄지도 모르는 상황이 마음에 걸려 묶음상품이나 대용량으로 구매하여 보충할 여분을 마련해 두는 편이다. 어디선가 가장 좋은 칫솔은 새 칫솔이라는 소리를 듣고 닳을 때마다 교체하려고 몇 통씩 구비해 두고 장류나 고기 등의 식재는 마트에 두 달은 넘게 사러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찬장과 냉동실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량으로 구매하여 할인도 받고 재구매하러 가는 동선도 줄이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유통기한이 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물건의 판매가 가능한 기간이다. 기한을 넘겼다고 해서 바로 상해버리거나 소비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보통 저녁 9시 즈음을 넘겨 마트에 가면 유통기한이 임박한 상품을 떨이로 종종 사는데 하루나 이틀 늦게 먹어도 별 탈은 없었고, 우유 같은 경우도 기한 이후 2주 정도까지는 마셔도 맛이나 건강에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하루나 한 달도 아니고 연(年) 단위로 넘어가게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1년 정도 지난 치약은 그냥 써도 되겠지, 2년 지난 립밤의 경우는 왠지 또 바르면 찝찝할 것 같은데, 간장은 3년이 지났지만 짜니까 괜찮지 않을까. 처음 물건을 넉넉히 들여놓았을 때의 든든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까움과 불안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사용하는 물건의 유통기한이 지나있다는 것은 집 안에 필요보다 물건이 많다는 방증이다. 하루나 한 달 기준으로 개인의 소비량을 구체적인 수치로 계산하지 않은 채 대충 근거 없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물건을 들여온 결과다. 이 단계에서는 어떤 물건이 몇 개가 있으며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상태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재고관리가 되지 않으니 물건이 부족할 때를 대비해 이미 여분이 많음에도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다시 똑같은 물건을 사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상황 개선을 위해 유통기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손속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음식이든 화장품이든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은 무조건 버렸다. 이 와중에도 아깝다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계속 쏟아져 나왔지만 눈 감고 무시하기로 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치약을 그렇게 많이 버렸는 데도 몇 년은 쓸 수 있는 양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부터는 버리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여분은 넘쳐났고 문제는 나였다. 내 손을 거쳐 우리 집으로 왔지만 손길 한 번 주지 못하고 다시 이별을 맞게 되었다. 좋아해서 사귄 게 아니라 그냥 연인이 되었다는 자신에 심취해 정작 상대에게는 실망만 안겨준 느낌이었다.


물건들은 이미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 숫자를 통해 객관적인 판단기준을 제공하는 유통기한, 대청소 중 서랍 구석에서 나온 동일한 물품들, 물건의 저장공간 부족으로 방 안 여기저기에 놓아둔 물건에 새끼발가락을 찧어 아파본 경험 등등. 사이좋게 지낼 마음도 없이 이름뿐인 관계에 집착한 업보는 그들의 무수한 이별요청으로 마무리되려 한다. 상대방에 대한 진심이나 존중 없이 시작한 인연의 씁쓸한 마지막을 연거푸 겪고 나니 만남이 조심스러워졌다. 앞으로 어떤 물건을 만날지 진심으로 기대가 된다. 아직 다듬어나가는 중이니 완벽한 주인으로서 맞이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대해줬으면 한다. 지난 연인들에 대한 감사와 후회만큼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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