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동 오두막

by 문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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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저녁 틈으로 길을 걸었다. 설주림을 처음 만나 함께 그저 걷기만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 지금의 설주림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 당시의 설주림 눈은 마치 염세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과 믿음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나 순수한 그녀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싶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응원하게 된다. 지금 그녀가 걸어 나가는 보폭은 처음에 비하면 놀랍도록 넓다. 따라가기 버겁다가도 어떤 수를 써서든 그녀와 함께 하고 싶어진다. 그래, 역시 이건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여러 증거 중 하나일 거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이 어둡고 길이 보이지 않아 밭두렁 아래로 숨었다. 웅크리고 있던 설주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걷고 오겠다는 그녀를 유민우가 위험하다며 말렸다.


-괜찮아. 아주 잠깐만 걷다 올게.


나는 설주림을 조용히 뒤따라 나왔다. 조용히 그녀를 따라 걸었다. 설주림은 위험해 보이게 자꾸 비틀대며 걸었다. 그럴 때마다 뒤통수에 끼고 있던 손깍지를 다급하게 풀었다. 하지만 이내 제 동선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은은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문득 설주림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무얼 상상하며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매웠다. 그렇게 조용히 미행만 하면서 설주림의 안위를 보살피겠다는 내 목적은 잃어갔다. 갑자기 멈추는 설주림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설주림을 앞질러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불렀을 때 그제야 나는 아차, 하고 뒤를 돌았다.


-방기욱.


나는 멈춰 섰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삐걱대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지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나는 어쭙잖은 변명하기를 그만두었다.


-너, 걱정돼서.


설주림은 작게 한숨을 쉬고, 옆에 있는 벤치로 다가가 앉고 나를 바라보며 옆을 톡톡 쳤다. 나는 속히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민우도 같이 오자고 할 걸 그랬어.


-글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진심을 삼켰다. 둘만 있고 싶었다고, 너와 이렇게 단둘이 옆에 마주 앉아보고 싶었다고. 난 그렇게 둘만 남았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밤하늘과 주변 풍경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설주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한테 민우는 어떤 존재야?


갑자기 들어온 어려운 질문에 사고가 멈췄다. 유민우가 나한테 어떤 존재냐고?


-글쎄.


설주림은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한테는 말이야. 너희가 아주 소중해. 잃고 싶지 않은 존재야. 어쩌면 누구보다도 가까운.


그리고 이어서 설주림은 말했다.


-나는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번 봄, 여름, 가을 동안 내 세상이 너무 많이 변했어. 나도 많이 달라졌고, 너도, 민우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랍도록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유민우가 변하고 있단 걸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유민우를 변하게 한 건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생각을 거쳐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나 때문에 변했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유민우를 팼기 때문이라고. 내가 누군가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공격하고, 시비 거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던가. 내가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싸움과 폭력은 필요했고, 내가 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유민우는 그런 것과 달랐다. 그를 향한 진심 어린 주먹다짐이었다. 내 욕심으로 유민우가 변한 건 아닐까. 그로 인해 설주림이 실망하거나, 웃음을 잃을까, 늘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나랑 유민우가 변해서 너는...


-상관없어. 너도 민우도, 변한다고 달라지지 않아.


그녀는 내가 기다렸던 답을 내어놓았다. 나는 안심이 된 건지 긴장이 풀린 건지 힘이 들었던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내가 혼란스럽듯이 민우도 지금쯤 내면에 있는 혼란 속에서 자신을 찾고 있겠지.


역시 유민우인가. 그녀의 마음속에는 유민우가 얼마나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거지. 나는 애써 웃어 보였다.


-유민우 데려올게. 이제 슬슬 움직여야지.


설주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유민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밭두렁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유민우를 불렀다. 그는 공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터덜터덜 설주림 곁으로 걸어갔다. 저녁 바람이 쌀쌀해 팔짱을 끼고 몸을 오므렸다. 그때 차 한 대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그때 난 직감에 이끌려 고개를 돌렸다. 없었다. 벤치가 텅 비어있었다. 설주림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자리를 옮겼다고 한들 이 평지에서 그녀가 안 보일 리 없다. 아니 정확히는 내 눈으로 찾지 못할 순 없었다.


-저거야.


난 뒤를 돌아 달리는 차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때 내 뒤에서 무언가 날아와 차의 뒷유리를 깨뜨렸다. 뒤를 돌아보니 유민우가 돌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자 차는 멈췄다. 나도 달리던 걸 멈추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시선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고 숨이 가팔라졌다. 그 순간 차는 큰 소리를 내고 빠른 속도로 후진하기 시작했다. 난 피하려고 몸을 오른쪽으로 던졌다. 밭에 빠진 몸의 이곳저곳이 쑤셨다. 난 그 몸을 겨우 일으켜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때 유민우는 이미 길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를 바라보고 차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발. 나는 그렇게 한 번 읊조리고 차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리고 뒷좌석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몇 번을 잡아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선 온갖 육두문자가 남발했다. 심장은 내 의지와 관계없이 몸집을 키웠다가 줄어들었다 하며 더욱 정신 사납게 했다. 몸을 돌려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뒤에서 둔탁한 물건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세상이 흐려지고 눈이 절로 감겨 몸이 앞으로 흘러내렸다. 맞은 부분이 꿈틀거리며 저릿한 느낌을 내었다. 울컥하며 따뜻한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마지막 순간 뒷좌석에 쓰러진 설주림을 보았다. 손 내밀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력한 내가 미웠다. 아팠다. 내 무능함에 난 소리 없는 비난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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