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단편소설집

by 집안의 불청객

싸구려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내가 하는 행동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 후 수업에 들어간다. 활발하고 수려한 외모 덕에 모두에게 관심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고 원하는 자리를 골라 앉는다.


수업은 지루하고 따분했다. 대학교 생활을 즐기고 싶었다. 성적은 그것에 포함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나누었다. 주인공은 언제나 나였고 술에 취하면 여자 남자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어깨를 빌렸다. 사랑한다는 감정은 아니었다. 단지 주사 중 하나 뿐이었다.


술자리가 끝나면 기숙사로 돌아와 일기를 쓴다. 일기의 내용은 점점 짧아져 갔다. 처음에는 장황하게 썼지만 이제는 귀찮은이 한층 더 강해졌다.


오늘은 동아리 알림이 있는 날이었다. 학생회관으로 가자 여러 중앙 동아리가 신입생 포섭을 위해 천막을 치고 호객했다. 동기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 중에 한 동아리에서 나에게 말을 건네었다.


“연극 동아리 아람입니다. 구경하고 가세요!”


‘연극’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내 몸 안의 무언가가 꿈틀했다. 약간의 이끌림 비슷한 것이었다. 애들을 이끌고 말했다.


“잠깐 구경하자.”


애들에게 있어서 나의 말은 거절하기 힘든 부탁이었다. 애들과 함께 동아리 부스로 들어갔다. 부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명이 자신의 동아리를 소개했다. 대충 학교 축제나 웹드라마 같은 것을 만들고 그 외에도 친목 활동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그저 심장이 빨리 뛰는 이 감각에 충실했다. 이 감각에 관해 조금 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러고 애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이층으로 올라갔다. 음식의 종류는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맛은 있었다. 그러나 그 맛을 느끼기에는 다른 생각이 이미 뇌를 지배하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하는 내 상태가 어디 아파 보였는지 멍해 보였는지 모르지만, 한 친구가 말했다.


“너 괜찮냐?”


허공을 주시하던 시선을 버리고 그 친구를 바라봤다.


“어. 왜?”


“아니 그냥 이상해서.”


“그래? 별로.”


“아니면 됐지. 뭐.”


식사를 마친 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애들과 술 약속을 잡거나 피시방에 가거나 당구를 치러 갔을 것이다. 애들은 내가 예상한 범위 내에서 그것들을 권유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거절했다. 내가 없으면 아쉽다는 말들을 내뱉었지만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간단하게 답만 남기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때 처음으로 아침에도 낮에도 위스키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노트북을 켜고 하루의 마무리가 아닌 중간에 일기를 작성했다. 사실 일기보다는 마음속의 그 느낌을 서술하고 싶었다.


연극이라는 단어에 꽂혔고 위스키를 한 모금 넘기며 연극 중에서 대본을 말하고 있는 나를 상상했다. 짜릿한 전율에 소름이 살짝 돋았다. 겉옷을 다시 입고 밖으로 나갔다.


도착한 곳은 아까 동아리 알림이 있던 곳이 아닌 동아리방이었다. 아무래도 겉으로 치장한 알림제의 모습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판단되어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은은한 디퓨저 향을 맞이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큰 카메라 한 대와 조명이 달린 작은 스튜디오 그리고 소파와 책상이 나란히 있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소파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 둘이 앉아 있었다. 남자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어떤 일 때문에 오셨어요?”


“동아리 가입할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서류 한 장을 건넸다. 몇 가지 조항이 있었지만 읽지 않고 아래 서명하는 곳에 이름을 적었다. 서류를 다 작성하자 그 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스물네 살 동아리 부장 김관태라고 합니다.”


나도 나를 소개했다.


“스무 살 이시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자신이 나이가 많으므로 말을 놓겠다고 했다. 별 거부반응은 없었다. 옆에 있던 여자도 일어서더니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연희야. 스물두 살.”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간단한 소개를 마치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는 이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었는지 말을 건넸다.


“오늘 동아리 알림이 끝나고 회식 있는데 너도 올래?”


“저야 가면 좋죠.”


그는 근처 술집의 이름과 약속 시간을 말했다. 더는 이 공간에 있어봤자 얻을 게 없어 나중에 보자는 말과 함께 기숙사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약간의 낮잠을 잤다. 아까 마셨던 위스키 탓인지 깊게 잠이 들었다. 저녁 여섯 시에 일어났고 약속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았다. 옥상으로 올라가 잠도 깰 겸 담배를 한 대 태웠다. 방으로 돌아가 코트 한 벌을 꺼내 입고 미리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들과 간단히 인사말을 나누었다. 일일이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도 관심을 받았다. 제일 많이 들은 말은 ‘배우 해도 되겠다’는 말이었다. 그럴 때마다 웃음과 함께 손을 좌우로 흔들며 ‘그 정도는 아니에요.’라고 답했다.


술집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웠기 때문에 어쩌면 대학의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었다. 안주와 술을 시키고 말을 나눴다. 그러던 중 김관태와 담배를 피우러 나가게 됐다.


“넌 왜 우리 동아리에 들어왔어?”


“연극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홀린 것처럼 꽂혔어요.”


“말은 잘하네.”


담배꽁초를 하수구에 버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비운 사이 취한 사람들이 여럿 보였고 김관태는 능숙하게 그들을 집이나 기숙사로 보냈다.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두 번째 술집으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마지막으로 나와 김관태 그리고 이연희 이렇게 셋이서 남게 되었다. 새벽 네 시가 되어 술집도 문을 닫았고 편의점에서 과자와 소주를 사서 마셨다. 둘은 취해서 했던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아 받아주기만 했다.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기숙사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셋 다 기숙사에 살아서 같은 곳으로 걸어갔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겨우 양치를 한 다음 큰 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공부에 흥미가 없다지만 다음날 수업에 가지 못했다. 여러 연락이 와 있었다. 대부분 안부에 관한 것이었다. 개인 사정이라고 둘러댄 후 바로 샤워하고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들어가자마자 어제 봤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김관태와 이연희에게 말을 붙였다. 말이 오고 가던 중 그가 물었다.


“이번 축제에 우리가 연극을 하거든? 한번 해볼래?”


그 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목적이 이것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듣기로 했다.


“무슨 역할인데요?”


그는 짧은 대본 하나를 건네며 나의 어깨를 두 번 치더니 말했다.


“조연 중 하나인데 크게 부담될 건 없어 저기 카메라에서 연기 해볼래?”


대본을 들고 카메라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처음 하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긴장되지 않았다. 대본을 들고 연기했다.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마자 그가 말했다.


“뭐야? 처음 하는 거 맞아? 왜 이렇게 잘해?”


좋은 티를 최대한 내지 않고 뒤통수를 조금 긁적이며 웃었다.


“그런가요.”


“오늘부터 연습하면 되겠는데? 다섯 시에 시간 가능해?”


“가능하죠.”


“그래. 좀 이따 봐.”


연극의 장르는 로맨스였다. 주연은 이연희였다. 내가 맡은 역은 그녀의 연애에 관한 고민을 들어주는 역이었다. 짧은 출연 시간이었지만 매일 다섯 시에 연습하러 나갔다.


축제 당일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동아리 공연은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맨 처음 순서인 우리는 더했다. 백 명도 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연극은 마무리를 지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의 연극을 본 사람 중 한 명이 웹드라마 제작 감독이었다. 그 감독은 축제 다음 날 동아리방으로 찾아와 김신 역할을 맡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것은 나였다. 감독은 나와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그가 명함을 건네며 말하려는 순간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가려고 하자 그는 명함을 읽어보라는 말을 하고 자신이 가져왔다. 명함에는 신철훈이라는 이름과 소속이 적혀있었다.


“명함 봤어요?”


“네,”


“저랑 같이 웹드라마 찍으실 생각은 없어요? 얼굴도 잘생기시고 연기력도 좋으시던데.”


혹시 이것이 사기나 다단계 또는 사이비 종교가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머리를 굴리자, 그는 핸드폰을 꺼내 영상 하나를 틀며 말했다.


“참고로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희가 찍은 웹드라마 ‘하소연’인데요. 보신 적 있으신가요?”


아쉽게도 연기에 관심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약간의 탄식을 뱉으며 말했다.


“이번에 찍을 로맨스 웹드라마가 있는데 주연을 저희가 아직 안 구했거든요. 면접이라도 한 번 봐주시면 고마울 것 같은데.”


“봐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러면 전화번호 주시면 저희가 스튜디오 주소 보내드릴 테니까 시간 조율해서 와주시면 될 것 같아요.”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시간 조율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해버렸다. 공강인 화요일에 보기로 했다.


화요일이 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일어났다. 마음의 긴장을 풀기 위해 위스키 한 잔을 마셨다. 오후 두 시에 보기로 했으므로 한 시에 출발하면 십 분 정도 일찍 도착할 것 같았다.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 식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스튜디오에 도착하자 동아리방과는 많이 비교되었다. 넓은 공간 여러 조명 카메라가 대표적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면접을 보러 왔다고 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한 여자가 답했다.


곧이어 신철훈이 스튜디오에서 나누어져 있는 여러 공간 중 하나에서 나왔다. 그리고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대본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면접 볼 상황은 바람피운 여자 친구에게 화를 내는 남자 친구입니다. 저쪽에 가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대본을 숙지할 시간은 단 십 분이었다. 대본을 읽고 바로 준비가 됐다고 했다. 카메라 렌즈에 비친 내 모습은 감정을 끌어올리게 해주었다. 연기에서 화를 내며 눈물을 흘리고 실제 상황인 것처럼 감정을 토해냈다. 면접이 끝나고 찌릿한 여운이 몸을 감싸안았다.


“좋습니다. 삼 일 뒤에 합격 여부 문자 보내드릴게요.”


밖으로 나가던 중 이연희를 마주쳤다. 서로 놀랐고 대화를 조금 나누었다. 그녀도 면접을 보러 왔다고 했다. 내가 같이 카페에 가자고 제안하자 승낙했다.


그녀의 면접은 짧은 나와 다르게 길었다. 밖에서 무슨 역할로 면접을 봤을지 생각하며 담배를 태웠다. 삼십 분이 지나서야 나와 카페로 향했다.


앉자마자 바로 수다를 떨었다. 무슨 역할로 면접에 응했는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러다 연애에 관해 김관태 얘기가 나왔다.


“요새 둘이 잘 지내세요?”


그녀가 갑자기 흐느꼈다.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건넸다. 그 상태로 오 분 정도가 지나자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최근에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른 동아리원의 부담 때문인 줄 알았다.


“슬프겠어요.”


“응. 많이.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감정을 잘 주체 못 하겠네.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이런 일에 굉장히 익숙해 보이네?”


“그냥 담담한 거죠.”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커피는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 무슨 얘기를 더 끌어야 할지 모를 때 갑자기 들이키더니 일어나자고 말했다. 같이 버스를 탔지만, 다른 좌석에 앉았다.


사흘 뒤 금요일 아침 문자가 왔는지 확인했다. 아직 오지 않았다. 원래도 그렇지만 유독 수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바뀐 것은 김관태와 이연희가 헤어졌다는 말을 듣자, 약간의 거부감이 생겼다. 그래서 사흘 동안 가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다섯 시에 끝나고 오늘 애들과 술 약속을 잡았다. 위스키를 즐기지만, 술에 강한 편은 아니었다. 세 시간 동안 소주 두 병을 마시자, 몸을 비틀거릴 정도로 취해 버렸다. 저녁 여덟 시가 되어도 연락이 오지 않아, 안되었다고 생각했다.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나 싶을 때 문자 한 통이 왔다.


“면접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저희 라티드와 함께 되어 축하합니다. 확인하시고 전화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그러던 중 밖에 나온 이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원래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술기운과 합격 여부 때문에 반갑게 인사했다.


“누나!”


그녀도 인제 보니 오른손에 담배가 있었다. 나와 있을 때는 피우지 않아서 비흡연자인 줄 알았다. 내가 물었다.


“담배 피우세요?”


“응. 피운 지 얼마 안 됐어.”


그때는 비흡연자가 맞았나 보다. 헤어진 것보다 어떻게 흡연하게 됐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나와 비슷한 구석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왜 피우게 됐어요?”


“그냥. 힘들어서. 생각해 보니 면접 붙었어?”


“누나 먼저 말해줘요.”


“난 붙었어.”


“저도 붙었어요.”


“그래? 다행이네. 아는 사람 한 명이라도 더 있어서.”


“나중에 술 한잔해요.”


“그래.”


그리고 각자 갈 길을 갔다. 그날 만취하고 여자인 친구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그런 나를 뿌리치지 않고 오히려 무릎에 눕혀 재웠다고 애들이 말해줬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토요일 아침이 되고 숙취 때문에 위스키를 마실 수가 없었다. 샤워 후 바로 어제 온 합격 통보 문자에 나와 있는 전화번호로 통화를 걸었다.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에 관해서 말하자 톤을 좀 올리더니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도 결론은 와서 얘기하는 것이 편하다였다. 다시 다음 주 화요일 두 시로 약속을 잡았다.


갑자기 이연희가 생각나서 짧은 안부와 함께 라티드 소속사에 관해서 연락을 보냈다. 바로 답장이 왔고 그녀도 역시 나랑 비슷한 시간에 약속이 잡혔다고 했다. 우리는 소속사와 얘기가 끝난 후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소속사와는 원만하게 얘기를 끝냈다. 이번에도 역시 밖으로 나오던 와중 그녀와 마주쳤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담배를 태우며 기다렸다. 곧이어 그녀도 나왔고 가기로 했던 술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많은 질문을 주고받았다. 단답식이 아닌 서술형으로 대화가 오고 갔다. 서로의 가치관이나 경험담도 그것에 포함되었다. 우리는 그것조차 비슷했다. 그렇기에 더욱 잘 통했다.


잘 통했던 만큼 술도 잘 들어갔다. 그렇게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면서 만취 직전까지 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어김없이 그녀 옆자리로 가서 어깨에 기댔다. 그녀는 어깨를 내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상태가 깨끗한 모텔이었다. 커튼을 걷자, 일출이 보였다. 속옷조차도 입고 있지 않았고 머리가 아팠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봤지만, 기억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이제야 침대가 눈에 들어왔고 그녀도 나체로 자고 있었다. 샤워부터 하자는 마음에 몸을 씻었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그녀가 일어나 있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말을 가로챘다.


“사귀자는 말은 안 할 거야. 그냥 우리는 서로 즐긴 것뿐이야.”


그 말에 동감했다. 혹여라도 이상한 감정을 품을까 봐 걱정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제 일어났던 일에 관해 궁금해 내가 물었다.


“어제 어떻게 된 거예요?”


“내가 하자고 했어. 너도 흔쾌히 승낙했고 궁금하면 더 자세히 말해줄 수도 있고.”


그 이후의 성관계 내용은 딱히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가끔 이런 것도 좋네. 앞으로도 필요하면 할래?”


필요가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필요가 나에게도 있어 적용되는지 잠깐 고민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걸 깨닫고 내가 답했다.


“그러죠. 지금 출발하면 수업은 들을 수 있겠네요. 먼저 들어갈게요.”


옷을 입고 먼저 방에서 나왔다. 핸드폰을 들고 지도를 켜서 기숙사에 도착한 후 노트북과 책을 챙겨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이상하게도 오늘 교양 수업 내용은 성과 관련된 세계 문화였다.


그 수업을 듣고 있자니 그녀와 어떻게 관계를 맺었는지 물어볼 걸 그랬다. 내 자세 사정까지의 시간 속도 등이 궁금해졌다.


그녀와 연결고리가 맺어지고 나서부터 다시 동아리방을 찾았다. 오랜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과의 관계가 비틀어지지는 않았기에 솎아있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왜냐하면 소문이 언제 퍼졌는지 모르지만, 라티드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티드에서는 일주일 정도 후에 웹드라마 촬영이 있다고 나를 불렀다. 맡은 배역에 관해 설명을 듣고 웹드라마에 관한 개요도 받았다. 딱 봐도 그렇게 작품성이 있지는 않았다. 상업용 그 자체였다. 좋게 말하면 대중성은 있지만 전달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촬영 일정은 당연히 이연희와 겹치는 수밖에 없었고 그럴 때마다 모텔에서 섹스했다. 서로 눈치채기 어렵지만 마음의 감정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한 플랫폼에 우리의 작품이 올라갔다. 운인지 실력인지는 모르지만,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회사에서 회식 날짜가 잡혔다.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회식은 한우였다. 이번 작품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철훈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언제 말할 거야?”


“뭘요?”


“연희 씨랑 만나는 거 다들 눈치채고 있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부정하는 말을 내뱉는 순간 마음속의 응어리가 졌다. 그 응어리가 뭔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가 다시 말을 속삭였다.


“촬영 끝나면 단둘이 술 먹고 모텔 가면서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이미 정해 놓은 상태에서 내가 답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사이’가 무엇인지 확실히 규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연희의 어깨를 두 번 쳤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내가 말했다.


“담배 피우러 가요.”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발걸음 소리가 유독 귀에 밟혔다. 그리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잡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가 물음을 던졌을 때였다.


“담배 없어?”


급하게 담배를 꺼낸다고 떨어뜨렸다. 재빨리 주워 입으로 불어 먼지를 털었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었다.


“누나 라이터 좀 줘요.”


그녀는 말없이 라이터를 꺼내 한 손으로 바람을 가리고 불을 켰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불을 붙였다. 들숨과 날숨만 교차하며 연기가 하늘로 흩어졌다. 어떻게 말을 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물음으로 가득 찼다.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 그녀가 말했다.


“뭐 말하고 싶은 거 있어?”


정곡이 찔렸다. 당황스러웠다.


“네?”


“뭐 말할 거 있냐고.”


그녀의 말투는 차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갑지도 않았다. 어중간한 그 사이 어디쯤 묘하게 흐트러져있었다.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뱉은 후에 말했다.


“우리 어떤 사이에요?”


“몰라.”


원하는 대답은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적어도 ‘어떤 사이가 되고 싶은데?’ ‘나랑 만날래?’ ‘그냥 섹스 파트너지 뭐’ 이런 대답은 생각했다. 하지만 ‘몰라’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어떤 말을 이어 나갈지도 알 수 없을 때 담배를 한 대 더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와 같이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녀는 라이터를 건네며 말했다.


“불 없다며 나 먼저 들어간다.”


라이터에는 손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어쩌면 그냥 발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돌아가려는 찰나 그 자리에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신철훈에게는 일이 생겨 먼저 집으로 들어간다고 연락 한 통을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 그녀와 접점은 생기지 않았다. 서로 의도적으로 피하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 연락하지도 않았다. 또한 촬영이 끝나면 서로 제각각 갈 길을 갔다. 아마도 소속사에서는 우리가 헤어진 것으로 소문이 난 모양인지 신철훈이 가끔 내게 물었다.


“요새 연희하고 어떻게 된 거야?”


그럴 때마다 대답을 회피하거나 말을 돌렸다. 그는 눈치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여러 번 물은 후에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촬영이 하나 잡혔다. 이연희와 내가 주연이었다. 달콤한 로맨스 드라마였다. 대본을 읽던 도중 키스 장면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노력했다. 입을 맞추었다. 혀가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포개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 후 포옹하면서 말했다.


“사랑해.”


감독은 그 장면이 매우 마음에 든다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다음 장면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신경 쓰였다. 촬영 후 그냥 가려는 이연희를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졌다. 내가 말했다.


“술 마셔요. 우리.”


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그래.”


되도록 시끄럽지 않고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거리를 배회하다 좁은 골목에 떨어져 있는 술집을 발견했다. 그녀는 처음 온 게 아닌 것처럼 능숙하게 술과 안주를 시켰다. 잔을 부딪치지 않고 마셨다. 그것이 우리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각자의 상황에 맞춰 마시기로 했으나 어색함이 싫어 조금 빨리 마셨다. 그녀가 취하길 바랐다. 그래야 진심이 나올 거로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소주잔을 일부러 부딪쳤다.


그 이후로 그녀는 나와 같은 속도로 마셨다. 한 시간 안에 무려 소주 세 병을 마셨다. 그래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나고 다섯 병을 넘겼다. 술기운 덕에 말할 용기가 생겼다.


“우리 무슨 사이예요?”


“몰라.”


“그런 대답 말고요.”


“연극이야 전부 다 연극.”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도 그리고 나도 둘 다 연극 안에서 사는 거야. 각자의 연극 속에서 스스로 속는 거지.”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취했어요?”


“아니 멀쩡해. 내가 말하는 의미가 뭔지 모르겠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녀의 말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혀요.”


“우리 둘이 섹스할 때 네가 절정에 이르지 않았지만, 그런 척을 한 것과 비슷한 거야. 그리고 술 마시기 싫어하는 나지만 너랑 있으면 좋아서 마신 것과도 비슷한 거고.”


그녀가 어떻게 알았는지 알 수 없었다. 콘돔 안의 정액을 확인이라도 한 것인가. 나는 분명 절정에 이른 연기를 위해 몸을 떨기도 성기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도 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는 연기하고 있는 거야 다만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녀는 일어나 계산하고 밖을 향했다. 나는 그녀를 붙잡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