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너는 뭘 해도 끝까지 못 한다고, 중간에 그만둔다고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언젠가 죽일 거라는 살인 예고가 나았다. 그들의 예고는 나의 자존심이며 미래며 모든 것을 죽이는 방법의 하나였다.
그런데 사실 그 말이 맞았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것을 시작하길 원했고 모든 것을 쉽게 포기했다.
그것을 제일 가까이서 본 것은 부모님과 친구였다. 부모님은 내가 무엇을 시작할 때마다 포기를 먼저 말했다.
친구들은 내가 무엇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응원했으나, 갈수록 말이 없어졌다.
점점 썩어나갔고 곪았고 그렇게 미래를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접은 미래는 많아졌고 선택지는 좁아졌다. 그렇게 나를 옥죄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왔던 것들이 한 번에 터져버렸다.
정신병은 다른 이들에게 손해를 끼친다는 예고였다. 암시적인, 그리고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증은 점점 심해졌고 남들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기대는 걸 시작하자 모든 걸 남 탓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와 있어 주지 않는다면, 자해나 자살을 예고 했다.
그런 예고는 그들이 나에게 절교의 예고를 하는 것과 똑같았다.
근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직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은 가정하고 행동했다.
사회 부적응자, 외톨이, 병신으로 다들 바라봤다. 아니, 다들 날 그렇게 바라본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이 나를 그렇게 보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자해한다거나 자살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예고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 무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말로만 구구절절 늘어놓을 뿐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실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나는 많은 시도를 했다.
차에 치이기 위해 새벽의 시간에 어두운 차도 중간에 서 있기도 했고 높은 곳이 무서웠지만, 올라가서 아래를 보기도 했다.
수십 번을 그랬다. 불운인지 행운인지 아무도 나를 죽일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용기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질끈 눈을 감고 떨어지거나,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면 될 텐데 말이다.
나는 과연 죽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자살이라는 예고를 하고 누군가 폭주하는 나를 막아주길 원했던 걸까.
모르겠다. 두 마음이 절묘하게 반씩 섞여 있던 것 같다. 죽고 싶으면서도 살고 싶었다는 어불성설이지만, 진짜로 그랬던 것 같다.
누군가가 바라보는 광경에서 내가 죽으면 그 둘을 다 이룰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죄책감을 누군가에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서 자유를 해방감을 얻으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예고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나는 살아갈 이유를 남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죽으려는 이유를 남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계속되는 모순의 충돌 속에서 해답은 당연히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니, 결과는 나왔지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예고는 그렇게 계속됐다. 남들도 그리고 나도 계속해서 피폐해지기만 했다.
아니, 남이 더 나았다. 친구와 부모님은 엄밀히 말하면 남이 아니니까.
완전히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신경조차 쓸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다.
가까우면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고통받기 십상이었다. 차라리 예고하지 않고 혼자 행했으면 어땠을까.
나의 장례식에 와서 자신에게 한 번이라도 말해 달라고 빌었을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조연처럼 느꼈을까.
고통과 죽음에 관한 압박을 받을 때는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삶을 저주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주인공이 되지 않아도 조연이 아니어도 등장인물이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서 묵묵히 할 일만 하면 가치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고는 앞으로, 미래로 바뀔 것이다. 불길한 예고가 아닌, 설계된 미래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 미래가 꼭 찬란하거나 기쁘거나 행복하거나 그런 것들이 아니어도 괜찮다.
목적이 있는 방향성이 있다면, 예고가 아닌 미래일 테니까 말이다.
나는 이제 삶을 살아간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에서 벗어났다. 의미 없는 삶이라는 버튼을 눌러 종료시킨 다음 새로운 버튼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