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 딱지

아빠라는 도서관을 인터뷰하다 10

by 빨간머리키키

"아빠, 어릴 때 제일 좋아하는 놀이가 뭐였어요?”

“딱지치기가 재미있었지. 종이가 귀해서 많이 만들지는 못했지만 제일 재미있었어.”


“소 먹이면서 심심하니까 낚시를 해 보고 싶었어. 낚싯바늘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바늘을 호롱불에 달군 다음에 구부려서 낚싯바늘을 만들었지. 그걸 긴 나뭇가지에 연결해서 낚싯대를 만들었어. 그런데 한 마리도 못 잡았어.”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주말마다 낚시를 가셨다. 주말의 메뉴는 항상 매운탕이었다.


“구슬치기도 하고 싶었는데, 그건 정말로 한 번도 못 했다. 구슬은 장에 가야 살 수 있는데, 아버지는 그런 건 다 낭비라고 하나도 안 사 주셨으니까.”

팔순이 넘은 아빠의 얼굴에 아쉬움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아빠의 이야기-하늘에서 뿌려진 선물


나는 딱지치기를 좋아했다. 동네 형들이 딱지를 있는 힘껏 내리쳐서 바닥에 있는 딱지를 넘겨버릴 때 어깨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졌다. 형이 있는 또래 녀석들은 자랑스레 딱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나는 형이 없어서 딱지를 구하려면 종이로 접는 것뿐인데, 문제는 종이가 귀하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귀한 시절이었다.


내가 딱지를 처음 손에 넣은 것은 일곱 살 때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 가을, 나는 혼자서 집을 보고 있었다. 새어머니가 아직 우리 집에 오기 전이었다. 아버지와 누나는 들에 일을 하러 가고 없었다.

큰집에서 떡 한 접시를 가지고 왔다. 그날은 큰집에서 묘사(시향)가 있던 참이어서 어머니 빈소에 올리라고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그야말로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먹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 떡을 통째로 들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옆집에는 국민학교 고학년 형이 있었다. 나는 형에게 떡 하고 책하고 바꾸자고 제안했다. 혹시나 형이 거절할까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형은 떡 접시를 받고 헌 교과서 한 권을 건네주었다.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나도 딱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책 한 권을 모조리 뜯어 몽땅 딱지를 접었다.


내가 또 한 번 딱지를 원 없이 접게 된 때는 나의 모교인 A중학교가 폭격을 맞을 즈음이었다. 당시 A중학교의 학교 기와에는 흰 페인트로 크게 영어 철자 S가 적혀 있었다. ‘School’, 즉 여기는 학교이니 폭격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인민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자 A중학교를 본부로 사용했다.


구월의 어느 저녁, 나는 마당에서 자다가 천둥소리처럼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벌떡 일어났다.

“꽝! 쾅!”

동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다음날 아침, 나는 소를 몰고 소리의 진원지라고 생각되는 산으로 가 보았다. 우리 외가로 가는 길목이어서 내가 아는 길이었다. 산으로 올라가 보니 큰 바위 근처에 커다란 통이 뒹굴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알록달록 여러 색으로 인쇄된 종이가 잔뜩 흩뿌려져 있었다. 종이 위에는 인천 상륙작전 그림과 한반도를 가위로 반으로 끊어놓은 그림이 반반 그려져 있었다. 남한이 북한을 이기고 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삐라였다. 공중에서 터져 사방으로 퍼져야 할 삐라가 미처 터지지 못하고 통째로 산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종이였다. 그것도 처음 보는 재질의 귀한 종이였다. 이거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 아닌가. 나는 신이 나서 삐라 종이를 지게에 잔뜩 실었다. 그리고 나서 저고리 주머니에, 바지춤에 최대한 쑤셔놓고, 손에도 잔뜩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삐라로 딱지도 접고, 불쏘시개로도 아주 유용하게 잘 썼다. 동네 사람들도 다들 한 지게씩 삐라 종이를 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밤에 비행기가 뜨더니 밤하늘에 폭죽처럼 붉은 섬광이 한동안 번쩍거렸다. 바로 그다음 날, 미군차량들이 우리 동네로 쫙 올라왔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들이 북진하는 길이었다. 그날 A중학교에 가 보니 인민군들은 후퇴를 했고, 학교 건물은 폭격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A중학교가 인민군 부대 본부라는 것을 UN에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삐라를 한 장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역사적인 기념품이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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