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지

by 채움과 비움

감은사지 가는 길


평소 존경하는 형님의 고향이 경주 감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포는 내게 낯선 땅이 아니었다. 언제나 가 보고 싶은 곳이었고 감포의 바람은 늘 내 귓가를 맴돌았다.


어느 여름날, 경주에서 볼일을 마친 늦은 오후, 나는 무작정 자동차 핸들을 감포로 돌렸다. 보문단지의 단정한 풍경을 뒤로하고, 덕동 댐의 물빛을 두고, 까마득하게 기울어가는 햇살을 등지며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도로는 몸을 세우듯 곧게 뻗은 감포읍의 지방도와 이어진다.


도로의 끝, 대종천이 동해와 만나는 그 자리에 이르렀을 때 야트막한 연대산 남쪽 기슭에서 두 개의 탑신이 하늘을 향해 조용히 솟아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감은사는 동해안의 품에 기댄 통일신라의 사찰이다. 지금은 삼층석탑 두 기와 금당, 강당의 터만이 남아 있고, 행정구역으로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일대가 된다.

절터가 있는 마을은 지금도 ‘탑골’이라 불린다. 탑의 기억이 마을의 이름으로 남은 것이다.

언덕 위 절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문무대왕 해중릉으로 전하는 대왕암이 망망한 수평선 위에 잠겨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스스로 선택한 무덤이다.

신라 문무왕은 통일의 위업을 이룬 뒤 왜구의 침입을 불법(佛法)의 힘으로 막고자 이곳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절이 완성되기 전에 눈을 감았다. 아들 신문왕이 682년에 비로소 절을 완성하였으니 감은사(感恩寺)라는 이름은 그 뜻 그대로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무왕은 “화장한 뼈를 동해 바다에 뿌려 달라.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천년고도의 끝자락에서 감포와 동해는 그렇게 호국의 바램과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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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위에서


그로부터 천삼백여 년이 흐른 지금, 금당과 중문은 사라진 지 오래고 마당을 거닐었을 스님들의 발소리도, 법고 소리도 이 들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감은사가 폐허가 된 것은 임진왜란 시기로 추정된다.

왜구를 막기 위해 세워진 절이 왜적에 의해 불탔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고, 그래서 더 장엄하고 애잔하다.


폐허는 인간의 욕망과 또 다른 욕망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에 의해 지워진 자리에 무덤처럼 폐허만 남았다.

돌무더기와 빈터 앞에서 나는 화려했던 역사보다 욕망의 덧없음을 먼저 떠올렸다.


감은사지를 뒤로하고 접어든 주상절리 길에는 오랜 세월의 균열과 주름이 깊게 패어 있다.

파도는 오늘도 그 균열 사이로 쉼 없이 밀려들고 부서지고 또 밀려온다.

어쩌면 지우는 것과 남기는 것은 애초에 욕망이라는 같은 힘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