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 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외부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진짜 삶'을 말한다.
이 책은 우리가 진짜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무기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안내한다.
현재 우리의 가장 첫 번째 문제는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시작부터 현대의 문제를 19세기 문제와 대비시키면서 현대인의 사이코 그램을 그린다.
인간에게 비자발적인 것이 존재해야 진짜 삶과 소외된 삶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녹록하지 않다.
이 책 속에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들어본 지구 상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시대별로 다 등장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역사를 거치면서 우연, 유동적 성립, 간단하게 구분하거나 나눌 수 없는 계층 및 계급은 물론 사물의 현상이나 특징까지 인간의 삶을 괴롭히고 성가시게 한다.
인간은 이런 가운데서도 끈기 있게 자율성을 보일 경우에만 삶을 의미 있게 유지할 수 있다.
비판적으로 진짜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 혹은 '천성'에 대한 질문을 정당화한다.
1.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15쪽~ )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19세기의 악덕은 1) 권위주의, 2) 야만적 착취, 3) 성과 인종차별, 4) 탐욕과 축재, 5)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였다.
1) 현대는 합리적 권위를 지향한다. 능력과 지식에 근거하며 비판을 허용한다. 복종과 마조히즘 같은 감정적 요인보다 직업 능력처럼 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현실적 인정에 바탕을 둔 권위를 말한다.
공개적으로 행사하는 권위와 익명의 권위를 구분해 보면, 오늘날 익명의 권위는 시장이며 여론이고, 건강한 인간 이성이다.
2) 그러나 전혀 다른 문제가 생겼다. 현재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이용한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사물로 변화시켰다. 19세기엔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스스로 사물이 된다면 자각하건 못 하건 병이 들고 만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으로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다. 이 병은 '신경증'이라 불리는 세기의 질병이다. 즉, 인생의 무의미함은 인간이 사물로 변한 데 그 원인이 있다.
3) 평등의 개념은 계몽주의 철학에서 절대주의 국가에 저항하며 발전했다. 칸트의 말대로 모든 인간은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한에서 서로 평등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 평등은 동일하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같다는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동등한 권리를 원하다면 타인들과 동일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등한 권리를 갖지 못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현대인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진다. 인간은 자신을, 자신의 확신,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자기 고유의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들과 구분되지 않을 때 자신과 일치한다고 느낀다.
4) 부모님 세대만 해도 축재와 절약이 대단한 덕목이었다. 오늘날엔 돈을 지출하고 소비하고 구매를 하고 사용해야 한다. 소비가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는 술, 담배, 강연, 책, 영화, 인간을 소비한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필요로 하는 사랑도 아이에게 필요한 신제품처럼 이야기한다. 우리는 풍요 속에서 살아가는 수동적 소비자이며, 젖병과 사과를 기다리는 영원한 신생아다.
우리는 사물을 생산하지만 타인과의 관계에서 - 사물과의 관계에서조차 - 극도로 비생산적이다.
5) 현대인은 사생활을 누릴 수 없이 무능력하다. 반드시 타인과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속감', '팀워크'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자신과 혼자 있을 수 없는 무능력, 자신이나 이웃의 은둔을 참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19세기의 중산층이나 상류층이 개인주의, 자기 중심주의라 부르던 행동과 정반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악덕을 짚어보니, 풍요의 월계관에 취해 있는 우리는 현재의 윤리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윤리도 100년 전 문제 못지않게 심각하다.
2. 인간의 본질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35쪽~ )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원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인간을 정의하는 속성 1) 칸트, 인간은 이성을 갖춘 존재 2) 인간은 사회적 동물, 즉 실존이 불가피하게 사회조직과 결합되어 있는 존재 3) 인간은 호모 파베르, 즉 도구를 만드는 생명체 4) 에른스트 카시러와 상징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정의하는 속성은, 인간은 상징을 창조하는 존재이며, 인간이 창조한 가장 중요한 상징은 언어라고 본다. 이상은 핵심적인 인간의 속성들이지만, 이들이 인간 본성 전체는 아니다.
'인간 본성' 혹은 '인간의 본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키르케고르, 카를 마르크스에서 윌리엄 제임스, 앙리 베르그송, 테야르 드샤르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생산한다는 사실, 인간이 자기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부단히 흐르는 과정으로 파악, 제임스는 정신의 생명은 '의식의 흐름'이라고 주장, 베르그송은 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생명이란 '지속'하는 것 등으로 시간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습성, 즉 우리 행동의 역학은 실체에 가장 가까운 우연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습성은 우리의 전 존재를 이루지는 못하지만 실제의 우리와 가장 가깝다.
스피노자의 사상도 비슷하다. '모든 사물은 가능한 한, 그리고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마르크스는 '불변의 고정된' 충동과 '특정 사회 형태, 특정한 생산 및 교환 조건에서 반응하는 상대적' 욕망을 구분했다.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입장은 스피노자, 마르크스의 사상과 공통점이 많다.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의 모델 특징은 자아와 이드(혹은 이상과 충동)의 갈등, 후기 이론에서는 삶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다.
인간은 인간의 실존에 내재하는 모순에 처해 있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과 달리 본능이 그의 행동을 주관할 정도는 아니다. 인간은 지능을 넘어 자신을 자각하지만 자연의 명령으로부터 달아나지는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기에 '자연의 변덕'이다. 이런 모순은 갈등과 두려움을, 더 나은 균형을 찾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불균형을 불러온다. 그러나 균형을 찾았다 해도 그 균형에 도달하자마자 새로운 모순이 등장한다. 인간은 다시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된다.
인간의 본질은 만드는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분열을 해결하는 수단인 이 대답들은 인간 본성을 표방하는 다양한 정의를 낳는다.
인간의 본성은 원칙일 뿐 아니라 능력이기도 하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자신을 자각하고 자신과 자신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진술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다. 바로 이 능력이 인간 본성의 기본 요인이다.
실존적 갈등이야말로 삶의 기초다. 프롬은 인간이야말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의식화 과정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기에 위대한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한다고 했을 때, 현대 산업사회처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시대는 없다. 오늘날 사회는 이성을 이용해 100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방식으로 자연을 지배한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술력을 통해 고무된 인간은 전 에너지를 물건의 생산과 소비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를 기계를 조작하고 그 기계에 조작당하는 사물로 느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착취당하지 않는 그만큼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3.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53쪽~ )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질적으로, 구체적으로 자유로운지, 얼마나 자유로운지의 문제이다.
자유처럼 다양하게 사용되는 단어도 별로 없다. 신체적 자유, 심리적 자유, 시민적 자유, 언론의 자유, 의견 개진의 자유, 양심의 자유, 신념의 자유, 한문의 자유 등 의미가 수없이 더 있다.
자유롭고 싶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수단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는 자유의지를, '더 나은 길을 알면서도 최악의 길을 가도록 우리를 유혹하는 힘'이라고 정의했다. 자유는 의지에 따른 결정을 내포하며, 의식적 인식을 의미한다. 자유는 사실이라기보다 가능성이다. 인간의 '진짜 인격'의 실현인 것이다.
자유가 원래부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유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말했듯 자유는 인간 존엄성 발견, 인간 본질 그 자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 유한성으로 인한 장애, 제약,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독립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4.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75쪽~ )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인간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우리는 자아실현이 사고 행위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인격의 실현을 통해, 모든 감정적 가능성과 지적 가능성이 활발하게 표현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가능성은 모두에게 깃들어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는 만큼만 실현된다. 적극적 자유는 통합된 전인격의 자발적인 활동에 있다.
타인의 기대에 순응하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이런 회의를 침묵시키고 어느 정도의 확신을 얻는다. 그러나 그 대가는 크다. 자발성과 개성을 포기하면 삶은 좌절한다. 그들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그의 감정이나 영혼은 이미 죽었다.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생명은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우리는 핸드백과 카드와 핸드폰, 손수건 등에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 '특별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은 '다름'에 굶주렸다는 증거이며, 우리에게 남은 개성의 마지막 흔적이다.
오늘날 인간은 삶에 굶주려 있다. 하지만 순응 주의자이기에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할 수 없고, 자극과 스릴의 형태를 띤 대용품을 움켜잡는다. 술과 스포츠가 주는 스릴이나 스크린의 허구적 인물을 통해 경험하는 스릴 말이다.
5.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107쪽~ )
'모든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출발 시점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한마디로 그가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다.'
현대인의 행동 동기인 '자아'는 사회적 자아다. 타인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에 따라 연기를 하는, 그가 맡은 객관적 기능의 주관적 위장과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자아다. 현대의 이기심은 사회적 자아를 대상으로 삼는 탐욕이며, 이는 진정한 자아의 좌절에 그 원인이 있다.
실제 현대인의 자아는 너무 허약해져서 전체 자아의 조각이 되었다. 즉 전인격의 다른 모든 요인은 배제한 채 지성과 의지력으로만 남은 것이다.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 인간은 서로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의 법칙이 통한다. 경제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서로 싸우고 필요할 경우 서로를 경제적으로 파멸시키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무관심은 피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상인과 고객의 관계 역시 도구적이다. 인간 상호 관계도 마찬가지로 소외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도구화와 소외가 가장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는 곳은 자아와의 관계다. - 헤겔과 마르크스는 소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특히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 Warenfetischismus'와 '노동의 소외 Enrfremdung derArbeit' 개념을 참조하면 좋다. -
인간은 상품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팔면서 스스로를 상품으로 느낀다. 육체의 힘을 팔기도 하고 상인과 의사, 사무직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판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판매하려면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만 한다. 이 인격은 상냥해야 하지만 인격의 주인은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기대들을 더 충족시켜야 한다.
다른 상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서도 이런 인간의 속성이 가진 가치는 시장이 결정한다. 심지어 그 속성의 존재까지도 시장이 결정한다. 한 인간이 제공할 수 있는 속성에 대해 수요가 없을 경우 그 속성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사용 가치가 있다고 해도 무가치한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자신감', '자존감' 역시 타인들이 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암시에 불과하다. 인기나 시장에서의 성공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수요가 있는 경우 그는 '누군가'이지만 인기가 없으면 그 누구도 아니다. 이렇듯 인격의 성공 여부에 자존감이 달려 있으므로 현대인에게 인기는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실생활에서 남보다 앞서가느냐는 물론이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지 혹은 열등감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지도 그 인기에 좌우된다.
심지어 미술관 작품 감상과 정치 판 흥행도 크게 다르지 않고, 명소를 찾아가서도 마찬가지다.
미적 판단에서도 렘브란트 그림을 만나면, 아름답고 인상적인 작품이라고 평하겠지만, 그 판단조차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기 기대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름답다고 평가한 것이다.
정치에 대한 의견을 물어도 같은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평범한 신문 독자에게 특정 정치 문제에 대해 물으면 그는 자신이 읽은 내용을 들려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의견이라고 주장한다. - 이것이 중요한 지점이다. - 그가 피력한 의견이 자신이 고민한 결과하고 확신하다. 아버지의 정치적 견해가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작은 공동체라면 '아들 자신'의 견해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또 다른 독자는 정보에 어두운 사람으로 취급당할까 두려워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어떤 의견을 내놓았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그의 '견해'는 본질적으로 연극이며, 경험과 소망과 지식이 자연스럽게 결합한 결과가 아니다.
명소를 찾았을 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사진으로 수도 없이 보았던 풍경에 불과한 경우도 적지 않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명소의 모사품이 되어 버린다.
오늘날 홍보에는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똑같은 문구를 무한 반복하고 특정 상표나 사람의 이미지를 방출한다. 예를 들어 특정 셔츠나 향수를 뿌리면 갑자기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런 방법은 본질상 비합리적이다. 상품의 품질과 무관하다. 아편이나 최면처럼 사람들의 비판적 능력을 무디게 만들거나 제거할 뿐이다. 광고는 백일몽을 자극하고 일정한 수준의 만족을 주지만 동시에 자신이 별 볼 일 없고 무기력하다는 느낌도 강화시킨다.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의 몸과 정신과 영혼은 그의 자산이며 그의 삶의 과제는 이것을 유익하게 투자하여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스스로를 투자하여 이윤을 내지 못한 사람은 패자라는 느낌을 받는다. 성공을 거두면 그것은 그의 성공이다.
물론 그의 가치는 항상 그 자신의 외부 요인들, 그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처럼 결정하는 변덕스러운 시장의 판단에 좌우된다. 시장에서 이윤을 내며 팔리지 못한 모든 상품이 그러하듯 제아무리 사용가치가 대단하다 해도 - 그의 교환가치와 관련해서는 - 무가치하다.
판매하려고 내놓은 인격은 가장 원시적인 문화에서조차 인간 특징으로 꼽히던 존엄성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스스로 소외된 인간은 자아감 전체를, 즉 스스로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느낌을 거의 상실할 수밖에 없다. 자아감은 스스로를 나의 경험, 나의 사고, 나의 감정, 나의 결정, 나의 판단, 나의 행위의 주체로 느끼는 데에서 탄생한다. 그러자면 나의 경험이 실제로 나 자신의 체험이지 소외된 체험이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사물은 자아가 없다. 사물이 되어버린 인간은 자아를 소유할 수 없다.
현대인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외부의 족쇄를 벗어던져야 한다. 자신이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지만 알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자유를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익명의 권위에 의지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자아를 받아들인다. 그럴수록 더 무력감을 느끼고 순응을 강요당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낙관주의와 피상적인 진취성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다.
6.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145쪽~ )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자신 및 사회의 운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결정적인 힘과 상황을 올바르게 통찰하는 것이다. 때문에 무지와 인식의 결핍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무력감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온갖 망상을 총동원하여 절망적으로 저항해 봤자 개인은 결국 내면적으로 그 무기력을 인식하게 된다.
올바른 사회 이론, 개인에게 적용할 올바른 심리학 이론을 갖추지 못한 것은 무력감의 중요한 원인이다. 이론은 행동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론이 존재하더라도, 심지어 그 이론에 살짝 다가간다 해도 인간은 아직 적극적 행동에 나설 능력이 없다.
7.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라. (183쪽~ 203쪽)
'태어날 준비는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포기할 용기, 타인과 달라지겠다는 용기, 고립을 참고 견디겠다는 용기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진짜와 순수 허울을 구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현대인은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 무의식적으로는 그 차이를 너무나 잘 인식하면서도 말이다.
장미꽃을 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실제로는 자신이 말을 배웠다는 사실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 대상을 인식하고 올바른 단어로 분류하는 방법을 배웠다. '보는 행위'는 실제로 보는 행위가 아니라 그 본질상 지적 행위다. 그렇다면 보는 행위의 참뜻은 무엇인가?
테니스 경기에서 공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면 재미를 느낀다. 계속 반복해서 봐도 지겹지 않다. 일차적 이유가 지적 경험이 아니라 재미이기 때문이다.
세젤예 손녀 꾸미가 할미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이 있다. 꾸미 책을 몇 권 모아 놓은 책장으로 가서 어린이 낭송 시집을 꺼내온다. 그리고 할미를 불러 매트 위 한 곳을 고사리 손가락으로 토닥토닥 두드리며 앉으라고 한다.
할미인 나도 16개월짜리 손녀도 그다음 행동을 이미 서로 잘 알고 있다.
꾸미에게 시집 낭송보다 더 중요한 건 1) 책의 겉 상자를 연다 2) 테이프 담긴 초록색 포장을 빼낸다 - 테이프는 꾸미가 오기 전에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둔다. 고사리 손으로 다 잡아 빼기 때문에 - 3) 책을 빼낸다. 4) 겉 상자를 닫는다 5) 겉 상자를 다시 연다 6) 테이프가 담겼던 초록색 포장을 다시 담는다 7) 시집을 다시 담는다 7) 겉 상자를 다시 꼭 닫는다 꾸미는 이런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 할미는 지루하지만 꾸미가 다른 곳으로 관심을 옮길 때까지 이 단순 동작을 함께 반복해 준다. 책의 겉 상자 속 내용물이 꽉 들어차서 아기가 혼자 내용물을 빼기는 쉽지 않다. 할미는 꾸미가 낑낑거리며 겉 상자를 열면 양손으로 아래를 잡아 주거나 상자를 손으로 조금 벌려 준다. 꾸미는 아주 만족스러워한다.
할미에겐 지루하기만 한 같은 동작을 꾸미는 계속 반복해서 한다. 꾸미에겐 이런 상황이 지적 경험이 아니라 재미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이는 친밀하고 서로 통한다. 꾸미를 사랑하기 때문에 할미는 지루함조차 잊게 된다.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을 본다. 그가 자신과 우리에게서 추상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이상을 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는 일반적인 공포증이 있는 데, 그 공포증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거나, 표면을 뚫고 핵심까지 밀고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겁을 낸다. 차라리 조금만 보려고 하며, 그때그때 우리의 계획을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하는 것 이상은 보려 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피상적 친밀함은 다른 사람에 대해 무관심한 우리 감정의 내적 상태에 상응한다.
우리는 그 사람을 투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왜곡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의 감정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특성은 불교 교리에서 말하는 탐(탐욕), 진(성냄), 치(어리석음)에 해당하는 3독이다. 탐욕을 갖고 상대에게 무언가를 원할 때 상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탐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가 강요하는 대로, 우리의 어리석음이 상상하는 대로 상대를 왜곡한다.
다른 사람을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그를 투영 없이,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이다.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 완벽하게 각성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도달한 사람만이, 자신의 투영과 왜곡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사람만이 창조적으로 살 것이다.
한 사람이나 사물의 전체를, 그것의 온전한 현실을 본다는 것은 현실에 꼭 들어맞는 응답을 하기 위한 조건이다. 응답하고 인식하고 인식 대상을 알아보는 감각을 갖추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진짜 삶'의 첫 번째 조건은 감탄의 능력이다. 아이들은 이 능력을 아직 갖고 있다.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감탄의 능력이야말로 예술과 학문의 모든 창조적 결과를 낳는 조건이다.
두 번째 조건은 집중력이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그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한다'라는 말은 그 일이 우리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진정으로 집중할 때는 지금 이 순간에 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집중해서 한다면 나에게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세 번째 조건은 자아 경험의 능력이다. 내가 하고 느끼는 것과 관련해서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생각에 해당되는 내용은 감정에도 해당된다. 자신의 자기와 자아를 진정으로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기 세계의 중심으로, 자기 행동의 진짜 장본인으로 경험한다. 그것이 프롬이 말하는 독창성이다.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감성, 즉 정체감이 필요하다. 이 '자아'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미치고 말 것이다. 정체감은 우리가 사는 문화에 따라 다르다. 개인이 아직 개체가 아닌 원시 사회의 '자기' 감정은 '나는 우리'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정체감은 내가 나를 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이 진척되고 집단과 분리된다. 독자적 개체인 그는 이제 스스로를 '나'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아'감정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오해가 존재한다. 심리학자들 중에는 이 감정을 자신에게 할당된 사회적 역할의 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이도 적지 않다. 타인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대한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경험상 그것이 우리 사회 대부분 사람들이 경험하는 자아의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짙은 불안과 공포, 강박적인 순응의 욕망을 초래하는 병리학적 현상이다. 이런 공포와 순응의 강박은 나 자신을 창의적인 내 행위의 장본인으로 느끼는 '자아' 감정을 키워야만 극복할 수 있다. 이 말이 결코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 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반대로 나는 나를 나인과의 관계의 과정에서만 '나'로 느낄 수 있다. 사물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도록 배워야 한다. 자기 인격의 경계를 초월하며, '나다'라고 느끼는 순간 '너는 너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다'라고도 느낀다.
네 번째 조건은 회피하지 않고 양극성에서 나오는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이런 생각은 갈등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완전히 반대된다. 갈등은 해로운 것이기에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진 오류다. 사실은 그 반대다. 갈등은 감탄의 원천이며, 자신의 힘과 흔히 '성격'이라 부는 것을 개발하는 원천이다. 갈등을 피하면 인간은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개인적이고 우연한 갈등도 존재하지만 인간 실존에 깊이 뿌리내린 갈등도 존재한다. 실존의 갈등이란 우리가 우리 몸을 통해 동물의 왕국에 소속되지만, 동시에 우리 자신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통해 이 동물의 왕국과 본성을 초월하는 사실 탓에 생겨나는 갈등이다.
우리는 인간 종이 누리거나 언젠가 누리게 될 모든 가능성을 대변하지만, 짧은 생애 동안 이 가능성 중에서 미미하게 작은 부분밖에 실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예방 조치를 취하지만 우리의 의지와 계획과 전혀 무관한 우연에 지배당한다. 우리는 이런 갈등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심오하게 경험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성으로도 수용해야 한다.
우리는 갈등뿐 아니라 양극성도 부인하려 한다. 양극성은 많은 분야에서 존재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기질의 양극성, 사회적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양극성은 남성과 여성이다. 물론 현대 문화가 양성 동등권을 통해 엄청난 진보를 이룬 것은 사실이다. 인종의 동등권 실행과 관련해서도 빠른 진보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성과에 진정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한쪽 면에서 보면 분명 좋을 일이지만 달리 보면 차이와 양극성의 홀대로 그 값을 치렀기 때문이다.
원래 평등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위인이며 결코 타인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하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그 차이를 개발할 권리가 있지만, 그 차이를 타인을 착취하는 데 이용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날 평등은 무리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동일성이다. 차이가 평등의 원칙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일반적인 공포가 지배하는 것이다.
진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탄생은 아이가 태아로 존재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숨쉬기를 시작할 때 일어나는 단 한 번의 과정이 아니다. 말하고 걷고 먹는 등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동시에 과거 상태를 떠난다는 의미다.
인간은 인간 고유의 이분二分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은 안전을 의미하는 과거 상태의 포기를 두려워하지만 자신의 힘을 더 자유롭게, 더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상태에 도달하고자 한다. 즉, 사물을 실제로 인식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자신의 힘을 믿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태어날 준비는 모든 안전과 착각을 포기할 준비이며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자신의 사고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관련하여서도 진리 말고는 그 무엇도 추구하지 않겠다는 용기는 믿음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이 여기서 뜻하는 믿음은 과학적 혹은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념에 대한 믿음이 아니며, '에무나 emuna' (구약에서 믿음을 칭하는 단어)가 확신을 뜻하는 것과 같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 나로서는 각자 자기가 바르게 믿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는 뜻이라고 이해한다. - 사고와 감정에서 자기 경험의 현실성을 확신하고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를 묻는 현대인들에게 에리히 프롬은 답한다.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최근 나의 무기력의 원인 영 순위는 건강(허리 통증)이었고,
첫 번째는 나 역시 '남이 바라는 나'로 살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었다.
몸의 어떤 부분의 부자유를 넘어 정신의 자유를 마음껏 유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진짜 삶'을 이 책을 통해 열심히 들여다보며 한 줄 한 줄 이해하고, 공감하며 집중했다.
오늘은 다시 한 뼘쯤 더 성장한 모습으로 조금은 엉거주춤 의자에 앉아 자판을 두드린다.
곁에 '에리히 프롬 진짜 삶을 말하다' -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책을 펴놓고 이 글을 쓴다.
지난 며칠간 누워서 혹은 엎드려서 05mm 샤프연필로 살살 그어놓은 줄을 따라가다 보니 활자들이 다시 살아서 움직이다.
한 번 더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집중력도 배가 되니 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