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가는 종가의 모습과 신분해방을 꿈꾸는 하층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
남원예촌 거리에서 산책을 즐기다 들어선 곳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인증한 백 년 가게 '경방루'다.
50 플러스 세대에게 자장면은 특별한 음식이다.
이사 가던 날과 졸업식 날은 당연히 자장면 먹는 날이었다.
초중고 졸업식 날 먹었던 짜장면의 맛은 '축복의 음식'이기도 했다.
이 음식을 먹고 나서야 졸업식이 완성됐고, 그래야 입학이든 취업이든 새로운 시작이 열렸다.
혼불문학관은 노봉마을에 있다.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매안마을이기도 하다.
종가, 노봉 서원, 청호저수지, 새암 바위, 호성 암, 노적봉 마이애 불상, 달맞이동산, 서도역, 근심 바위, 늦바위고개, 당골네 집, 홍송 숲 등 마을 주변 장소가 소설 속에 그대로 살아있다. 노봉마을은 최명희 작가의 선조들이 500년 동안 자리 잡고 살아온 터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30년부터 1943년까지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인 해방 직전이다.
문학적 배경은 수백 년 대를 이어오던 남원 매안이 씨 집안의 무너져 가는 종가를 둘러싼 가족사를 다룬 작품이다.
청상의 몸으로 기울어가는 종갓집을 힘겹게 일으켜 세우는 청암 부인, 허약하고 무책임한 종손 강모를 낳은 며느리 율촌 댁, 강모의 색시이자 손부인 효원이 종부 3대를 잇는 주인공들이다.
종갓집에 붙어서 땅을 부치며 치열하게 생을 부지하는 하층민의 ‘거멍굴 사람들’과 중인들이 등장하고, 상인들이 모여 살았던 고리배미 마을이 서도역을 조금 지나다 보면 보인다.
『혼불』은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봉건시대 문화 속에서 대를 이어가는 종가의 모습과 신분해방을 꿈꾸는 하층민들 간의 표출되지 않는 갈등과 애환을 다룬 명작으로 손꼽힌다.
혼불 전시관 뒤로 지리산 노적봉이 전시관과 방문객들을 모두 품어주는 형상이 아름답고 따사롭다.
전시관에는 작가 살아생전 집필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작가는 '성보암' 집필실에서 17년간 세월을 글로 채워나갔다.
최명희 작가의 혼과 소설 『혼불』이 그대로 녹아내린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숙연함을 지울 수 없었다.
콩알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 망했다 하지만
내가 망하지 않는 한
결고 나라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가령 비유하자면
나라와 백성의 관계는
콩꼬투리와 콩알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록 콩껍질이 말라서
비틀어져 시든다 해도
그 속에 든
콩은 잠시 어둠 속에 떨어져
새 숨을 기르다가
다시 싹터 무수한 열매를 조롱조롱
콩밭 가득 맺게 하나니 - 소설『혼불』중에서 -
전시관 한편에는 '혼불'에 등장하는 주요 장면 십여 개를 『혼불』 디오라마 형식으로 구성해 놓았다. 관람객들은 당시 시대 생활상을 쉽게 엿볼 수 있으며, 소설 『혼불』에 대한 이해도 높일 수 있다.
*디오라마 형식 : 풍경이나 그림을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표현한 것
'땅은 천한 것일수록
귀하게 맏아들여
새롭게 만들어 준다.
땅에서는 무엇이든지 썩어야 한다.
썩은 것은 거름이 되어
곡식도 기름지게 하고
풀도 무성하게 하고
나무도 단단하게 키운다.
썩혀서 비로소
다른 생명으로 물오르게 한다.
-혼불 제3권 중에서-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선다.
80년~ 90년 전 혼불』속 주인공들이 책 속에서 걸어 나와, 함께 전시관을 둘러본 기분이다.
당시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를 타고났다. 양반으로 중인으로 상인으로 백정으로.
계급사회는 역사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개인의 성장을 막기도 했다.
현대라고 크게 달라졌을까?
지금은 부자와 가난하자 혹은 권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로 다시 나뉜다.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부와 위치인 경우도 더러 있지만, 좀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엄빠 찬스나 가문의 영광을 그대로 내려받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이 문제다.
보통 시민의 아들딸들이 크게 좌절하거나 아예 무관심으로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모습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혼불문학관의 아름다운 풍경이 괜스레 쓸쓸하게 느껴진다.
눈부신 햇살에 두 눈이 아리다.
마음도 좀 허전하고.
최명희 작가는 "웬일인지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온갖 정성으로 쓴 『혼불』이 새암을 이뤄 위로와 해원의 바다가 되길 바라는 작가의 뜻을 담아 새암 바위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