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역사적 가치는 축소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 그냥 스쳐가 버렸다.
남원 교룡산성은 남원시의 북서쪽에 위치한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산줄기를 따라 돌로 쌓은 교룡산성(蛟龍山城)을 말한다. 남원시 산곡동에 있는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쌓은 유서 깊은 성이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맞아 싸웠고 정유재란 당시 권율이 승병장 처영에게 명하여 교룡산성을 수축했으나 왜군에 의해 대부분 파괴됐다.
성안으로, 685년 창건된 '선국사'라는 호국도량 사찰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출가한 곳이 바로 교룡산성 내 덕밀암이다.
교룡산성 내 은적암은 동학의 창시자인 최재우가 천도교의 성전을 집필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 석축 산성은 해발 518m인 교룡산 험준함을 그대로 살려 축조되었으며 둘레가 3,120m에 이른다.
천혜의 지형이 외지고 깊은 산세라 유사시 인근 주민들의 대피처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전투하기 유리한 군사적 요새이기도 했다.
현재, 홍예문과 옹성(甕城) 그리고 산 중턱의 성벽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당시 백제인들의 섬세하면서도 강건한 손길이 느껴진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왕이 세운 나라다.
한강 유역에 터를 잡고 나라의 기틀을 세워 발전했으며, 4세기 중반 근초고왕(346년 즉위 ~375년)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근초고왕의 태어난 해는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도 재위 2년~21년 사이의 기록이 전혀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백제는 세련되고 고급진 우아한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660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승자의 역사는 확대 해석된 기록으로 남고, 패자의 역사는 귀한 역사적 가치까지 축소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 그냥 스쳐가 버린다. 백제 멸망 수백 년 후, 고려 시대 <삼국사기>에 담긴 기록은 백제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산성 입구에는 양편으로 성이 쌓여 있고 가운데 계곡 부분은 끊어져 있다.
성안으로 99개나 되는 우물이 있었다고 하니, 수원이 풍부한 곳으로 수문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4방향에 4대 문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동문과 성벽은 조선시대에 축성한 것이다.
동문 향일루(向日樓), 남문 완월루(翫月樓), 서문 망미루(望美樓)와 북문 공신루(拱宸樓)가 있었다’고 1699년 남원부에서 처음으로 편찬한 ‘용성지(龍城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은둔했던 곳이며 동학의 지도자인 김개남이 교룡산성을 증축하고 저항했던 곳이다.
옛날에는 남원 교룡산성에서 내려다보면 멀리 하얀 배 밭이 펼쳐져 있어서 ‘이화문전’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남원읍성에서 전라도를 점령하고 한양으로 북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 10만 명이 남원읍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조명연합군과 백성들이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순국한 병사와 백성 1만여 명의 시신을 한 곳에 묻은 무덤이 ‘만인의총(萬人義塚)’ 유적지로 남아있다.
교룡산성의 출입 석문은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을 잇댄 아치형이다.
이 홍예문은 직사각형의 크고 긴 바위 15장이 아치형으로 잇대어져 있다.
다듬어진 바위 하나하나가 모두 조금씩 다른 크기다.
맨 아래 단은 넓적한 바위가 받침대 구실을 하고,
그 위 좌우로 커다란 직사각형의 바위들이 조금씩 작아지면서 잇대어져 스스로 힘의 균형과 강건함의 조화를 이룬다.
백제인들의 은둔과 저항, 전쟁과 멸망으로부터 쭉 이어온 숱한 세월이 이곳 산성에 그 흔적을 남겼다.
쌓아 올린 성벽 바위와 이끼 낀 돌담에서 고달팠을 백제 장인들의 꼼꼼한 손길이 느껴진다.
홍예문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석단 위로 10개의 각기 다른 비석 군인 공덕비가 보인다.
공덕비를 돌아서면, 토종닭 백숙 음식점이 있고,
계곡 건너 맞은편으로 마을 주민이 키우고 있는 토종닭들이 널찍한 평지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고 있다.
별안간 우렁찬 목소리로 "꼬끼오~"라고 여기저기서 소리를 내지르곤 해서 조용한 숲길이 "꼬꼬댁 꼬꼬~" 소리로 시끌시끌하다.
선국사에 이르는 돌계단을 따라 위로 계속 올라간다.
수량이 풍부하기 때문인지, 비가 많이 내릴 때를 대비해서인지 오른쪽 비탈길엔 두꺼운 야자 매트가 깔려 있다.
우리는 덕밀암 가는 오른쪽 길을 지나쳐 굽이진 산길을 계속 올라간다.
강렬한 오후의 햇볕이 짙게 드리워진 녹음 사이를 들고난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조용한 산길에서, 멀리 토종닭들이 부르는 노래가 숲 속을 울린다.
선국사는 군량미 보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리산 자락이 품은 작은 사찰이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초들의 호국안민 사상이 가득 담긴 곳이다. 둘러보면서도 가볍고 경쾌하기보단 고단한 세월의 흔적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살아가는 일, 나라를 지키고, 자신을 바로 세우는 일은 백제인이나 현대인이나 다르지 않겠지. 끝내 나당연합군에 패하고 국가를 지키지 못했지만, 애써 지켜온 귀한 역사조차 기록으로 제대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것이 종내 아쉽다.
수년 전, 미륵사지 절터를 돌아보고, 백제 무왕의 커다랗던 꿈의 실체가 느껴져 전율했던 기억이 난다.
삼국 중, 가장 약해 보였던 백제의 강건함도 그때 새롭게 알게 되었다.
미륵사 복원을 통해, 백제인과 우리 민족의 못다 이룬 꿈들도 다시 짚어보았고, 문화강국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들을 지켜보며 살고 있으니 후손으로서 긍지를 느낀다.
덕밀암 가는 길은 '가지 않은 길'로 남겨두고 보제루를 향해 왼쪽 돌계단을 오른다.
눈길 닿는 곳마다 마가렛 흰 꽃이 우리 부부를 격하게 환영한다.
처음엔 구절초로 생각했으나, 구절초는 가을에 피는 꽃이니, 5월에 핀 이 흰 꽃 무리들은 마가렛이 맞겠지!
백제시대 지어진 사찰 정원엔 구절초가 딱 제격인데...
마가렛 예쁜 꽃 이름이 이곳에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뭐, 꽃은 다 예쁘다.
살아있는 모든 이들은 다 귀하다.
'마가렛' 너의 이름을 꼭 부르고 싶은 5월 봄날이다.
보제루는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디딤돌까지만 올라서서 맞은편 풍경을 감상하면 된다.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는 산성 내에 있다고 산성 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신문왕 5년(685)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용천이 있다고 하여 용천사라 했다.
선국사로 이름이 바뀐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사찰은 교룡산성을 지키는 군 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선국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세웠다고 전해지며, 순조 3년(1803)에 다시 지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으로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 쪽(공포 栱包)이 기둥머리 바로 위에 짜 놓은 공포와 섬세하게 이어진 형상이 곱다.
공포 사이의 공간에는 불상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교룡산성 승장 동인’이란 도장과 민속자료 제5호인 큰 북이 보존되어 있어 역대 승병장의 본거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한 5월 25일(수), 대웅전 문은 굳게 잠겨있다.
남원시 주생면 출신인 조선시대 문학자 양성지(梁誠之)가 쓴 '교룡산성에 올라'라는 시
登南原蛟龍山城 교룡산성에 올라
邑在湖南山水間 / 남원 고을은 호남 산수 간에 있고
孤城屹屹路回盤 / 외로운 성 우뚝우뚝 길을 돌아 자리하니
帶方自是雄藩地 / 대방으로부터 남경의 땅이 되었네
控抱猶能制人蠻 / 만방을 제압하던 요충지로다
위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자주적 역사의식 속에서 고향 남원에 대한 다정한 정감의 마음과 청만 한 기상이 고양된 자긍심이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료제공 : 남원문화원)
백제로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적 의미만으로도 훌륭한 유적지이나, 이날 선국사에서 우리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만나질 못했다.
사찰 사무소에서 사람들 소리는 두런두런 들렸으나, 아무도 밖으로 나온 사람은 없었다.
찾는 사람이 없으니, 반기는 이도 없다.
남원을 둘러보면서 꽤 아름답고 가치 있는 유적지로 보이는 데도 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면 많이 안타까웠다.
이곳 교룡산성과 선국사도 오랜 세월 품어온 역사와 아름다운 풍경만으로도 다시 찾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나, 이렇게 찾는 이들이 없으니 절에서도 어쩌다 누가 왔다가는 것조차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우리 부부는 풍경을 울리는 바람 소리에 절로 힐링되는 시간을 보냈다.
마냥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이런 힐링의 순간을 우리만 누린다는 것이 크게 아쉽던 날이었다.
이곳에라도 널리 알리고 싶지만, 능력 또한 부족하니 그저 정성을 다해 써서 올릴 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ApBdcxDwSQ
산신각에서 경내를 쓱 둘러보고, 대웅전 앞뜰로 내려온다.
선국사에서는 안내책자나 브로슈어 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내인이라도 마주치면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리 부부 말고 사람은 아무도 만나질 못했다.
검색해 보아도 '선국사'만 따로 자세하게 소개한 내용은 찾지 못한 채 여기서 글을 접는다.
선국사를 나서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마음 따라 눈길도 함께 머물다 돌아선다.
우리는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즐기고, 숙소로 돌아간다.
https://www.namwon.go.kr/tour/index.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