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은 황산대첩의 승리가 '여러 사람의 공'임을 성지 적벽에 새겼다.
황산대첩비는 남원시 운봉읍 가산 화수길 84번지 널따란 평지 위에 담대하게 서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도 마을 전체가 어수선했다.
왜구들이 지리산 방면을 집중 공격해 들어오자, 당시 전승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성계가 이들 왜구 토벌에 앞장서 나섰다.
고려 32대 우왕 6년(1380년), 이성계 장군은 당시 운봉면 화수리 황산 일대에서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전멸시킨다.
이 승리의 전쟁이 황산대첩(荒山大捷)이다.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고려 시대 왜구와 싸워 승리한 2대 대첩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황산대첩이 고려의 승리로 끝나자, 왜구의 침입이 거의 없어졌다.
조정에서도 왜구 대책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황산대첩비를 이곳 황산 벌에 세웠다.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은 승전지인 황산 대첩지의 '황산' 지명이 바뀌어 잊혀가니, 비석을 세워야 한다고 조정에 청한다. 이 청이 받아들여져 황산대첩비가 왕명으로 건립된다.
- 이성계는 아군보다 10배가 넘는 왜적을 대파함으로써 만세에 평안함을 이루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이 비를 세운다 -라는 내용이 황산대첩비에 그대로 남아있다.
건립 당시, 황산대첩비를 수호하는 비각과 별장청 건물도 함께 지졌는데, 지금은 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황산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고, 1957년에야 다시 복원했다.
귀부(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와 이수(귓불)는 옛것을 찾아 복원하였지만 비신은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파손된 비석의 원형은 되돌릴 수 없었다.
원형과 같은 검은 대리석으로 비를 다시 만들어 세워야 했다.
일제는 파비각 비석도 모두 파괴했다.
'고려시대 왜구와 싸워 승리했다는 조선의 오랜 역사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테지!'
폭파된 비석 조각들을 한 곳에 모아 일제의 만행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황산대첩 비터 안에 있는 이곳 파비각에서 악랄한 일제의 잔상을 목격할 수 있다.
파비각의 비석 조각들을 보면 비석을 폭파시키는 것도 모자라 비석 조각의 글씨까지도 읽지 못하도록 긁어놓은 일제강점기 만행에 다시 한번 전율하게 된다.
그들은 과거의 행적을 뉘우치기는커녕 항상 못된 이웃으로 남아있다.
이곳 황산대첩 비지에도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항상 찾아왔으면 좋겠다.
너무 조용한 황산벌을 굽어보니, 서서히 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이곳에서 왜구와 싸우다 이름 없이 쓰러져간 병사들의 함성이 귀가로 들리는 듯하고,
일제 강점지에 핍박받던 조상들의 신음 소리도 가까이 들렸다 멀어져 간다.
대대손손 지켜가야 할 우리 산야가 오늘따라 눈이 부시도록 더 아름답다.
우왕은 황산대첩의 승리가 '여러 사람의 공'임을 세상에 두루 알린다.
어휘각 짧은 안내 글을 읽으면서 임금 된 도리를 이렇게 후대의 평범한 한 시민이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에 긍지를 느낀다.
지도자에게는 많은 덕목이 필요하다. 지도력과 능력, 도덕, 청렴, 정직, 공평 등등.
이 많은 덕목들 중, 공을 백성들에게 돌리는 것이야말로 충(忠), 효(孝), 인(仁), 의(義)를 본보기로 보여주는 참모습이 아닐까!
일제는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곧은 정신은 절대 폭파하거나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을 이미 깊이 깨닫고 있었기에 이렇듯 거친 말살정책을 펼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