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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Aug 25. 2022

지금 내리는 보슬비는 가을을 알리는 서곡

채송화, 부추꽃도 서서히 결실을 준비하는 시간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든다.

무더위와 물난리로 8월 7일 입추, 15일 말복, 23일 처서를 힘겹게 지나오니 한 주 전과 확연히 다른 가을의 숨소리가 느껴진다.

활짝 젖혀놓던 창들을 반쯤 닫고, 색 바랜 청재킷을 꺼내 입는다.

잔뜩 찌푸린 하늘가로 눈길이 머물다 보니,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오늘 중부지방에 비가 내린다더니, 아침부터 찾아들었다.

비는 보슬비 정도로 내리겠지만, 여름의 이별을 알리는 서곡임이 분명하다.

8월도 바삐 떠날 준비를 한다.

항상 무성한 초록, 짙은 녹음을 품어주던 여름.

그러나 남긴 생채기가 너무 컸다.

아직 아물지 못한 아픈 흔적들이 오늘은 보슬비를 맞는다.

별안간 늙고 지친 몰골로 떠나려는 성하의 계절을 향해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는다.

지구촌 사람들이 스스로 자처해온 생활 태도로 극심한 폭염과 115년 만의 폭우가 쏟아부었으니, 계절이 오가는 당연한 자연의 이치조차 고맙기만 하다.

앞으로 올해보다 더 극심한 폭염과 극한 물폭탄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예측들이 틀리길 바라지만...

가을이 오려하고, 여름이 자리를 내주려는 당연한 순리가 깨어질까 두렵다.

작은 테라스 텃밭, 채송화와 부추 꽃이 보슬비를 맞으며 오늘도 쑥쑥 성장한다.

가을의 숨결도 보슬비를 타고 함께 내려온다.



노란 채송화 꽃이 귀여운 아기 얼굴 같기도 하고, 삐약 삐약 노란 병아리를 떠 올리게도 한다.

내가 심은 적도 없는 채송화가 어느 날 백서 향나무가 살고 있는 화분 한 편에 의젓하게 자리를 차고앉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으니, 볼수록 기특하다. 근처에서 채송화 꽃을 본 적도 없으니,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신기하다.

어디서 어찌 날려 왔는지 모르지만, 한 여름 내내 폭우 속에서도 작은 노란 꽃을 피워냈으니 대견할 수밖에 없다.

채송화 꽃은 가련, 순진, 천진난만이란 꽃말이 딱 어울린다.

처음 이사 올 때처럼 테라스 텃밭으로 자주 올라가지도, 열심히 돌보지도 않는 게으른 내겐 과분하게 귀한 손님이다.

백서 향나무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자기 집으로 허락도 없이 날아들어온 씨앗을 밀어내지 않고, 집안 한 구석을 쓱 내주었으니 그 태도를 폭풍 칭찬해 준다.


부추 곁에 심었던 상추는 벌써 정리한 상태여서 공간이 넉넉하다.


부추도 해마다 따로 심은 적이 없지만 매해 싹이 나서 쑥쑥 자란다.

부추는 한 번만 씨앗을 뿌리면 매해 봄마다 변함없이 찾아오는 의리의 채소다.

우리 테라스 텃밭 부추도 여러 해 전에 심어 피어난 꽃에서 자연적으로 씨가 떨어졌다가 화분 흙속에서 겨울을 이겨내고 뿌리를 내리고 다시 싹을 틔우고 있는가 보다.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지치지 않고 온몸으로 보여주며 찾아오는 야채가 또 있을까?

부추와 부추꽃이야말로 소중한 단골손님이다.

이번 여름에도 몇 번씩 밑동을 잘라다 부침개에도 넣어 먹었고, 구운 삼겹살, 오이소박이에도 잘 이용했다.


2017년 9월 10일 피었던 부추꽃 모습 - 이 때는 먹기보단 보고 즐기기만 해서, 잘라내지 않은 부추가 무성한 상태.

잘라낸 밑동에서는 곧 다시 초록잎이 쑥쑥 자라, 강인함에 매번 놀라곤 한다. 2주 정도 잘라내지 않고 그냥 두었더니 부추도 가을 준비를 하는지, 예년처럼 꽃대가 올라와 다시 흰꽃을 무성하게 피운다.

작은 삼각뿔 모양의 꽃봉오리가 많게는 30개씩도 매달려 있으니, 그 모습이 지상의 별 같기도 하다.

나는 우리 집 부추에게 '별 안개꽃'이라는 애칭을 지어주었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더 희게 더 예쁘게 빛난다.

그런데 꽃말이 '무한한 슬픔'이라니, 비로소 별 안개꽃 봉오리마다 머금고 있던 눈물이 보인다.

밤하늘 별처럼 희게 빛나는 꽃 봉오리가 하나씩 피어날 때마다 떨구는 눈물일랑 내 손으로 닦아 주어야겠다.

가을엔 그지없이 이어지는 슬픔일랑 멈추고, 매년 같은 모습으로 계속 만나길 바랄 뿐이다.

부추꽃의 다 알 수 없는 슬픔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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