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meday Dec 13. 2022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전하는 반전과 평화의 울림

그의 그림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방어를 하는 훌륭한 무기이기도 하다.

'전쟁과 평화'하면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와 함께 강렬하게 떠오르는 한 사람이 더 있다. 

바로 <게르니카>의 참상을 화폭에 담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973)다.

파블로 피카소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출생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 대표적 큐비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 《아비뇽의 처녀들》, 《게르니카》 등이 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가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그린 명작이다.

지난 일요일 밤, 'KBS 예썰의 전당' 주인공은 파블로 피카소였다. 

그는 천재 화가이며, 그의 그림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방어를 하는 훌륭한 무기이기도 하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다. 

1937년 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같은 해 열리기로 되었던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 관 벽화 제작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조국의 비보를 듣고, 한 달 반 만에 벽화를 완성하고, 제목을 <게르니카>라고 붙였다.


사진출처 : 위기 백과  - <게르니카>, 1973

<게르니카>는 그 어떤 말보다도 강한 예술의 힘과 커다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게르니카>와 같은 해에 그려진 <우는 여인>도 전쟁의 슬픔을 담았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 담긴 여러 감정 표현을 결집한 결과물로 <우는 여인> 시리즈를 남겼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 연작, 1973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인 '게르니카'를 그리기 위해서 얼굴을 연구하던 중, 우는 여자를 그리게 된다.  

전쟁의 공포를 여인의 초상화로 표현한 것도 특별하다.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태동하게 된 이 그림 연작의 모델은 피카소의 연인인 사진작가  도라 마르다.

<우는 여인>은 전쟁의 비극과 공포를 표현한 첫 번째 실험작이다. 

무채색 <게르니카>와 달리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했다. 

피카소의 추상화는 다양한 관점에서 본 것을 한 번에 담아내려는 창조적인 시도다. 

도라 마르는 피카소 <게르니카> 제작의 든든한 조력자로 <게르니카> 제작 전 과정을 사진으로 남긴다. 

피카소와 도라 마르, 1937년. 사진: 만 레이

피카소의 <우는 여인> 연작은 드로잉까지 합치면 서른 점이 넘는다.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어 다양한 시각으로 본질을 표현한 피카소도 초창기엔 사실주의 기법으로 작품을 그렸다. 

그는 "나는 본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대로 그린다."라고 밝혔다. 

피카소는 입체파의 창시자이다. 

입체파는 20세기 초 프랑스에 일어난 서양미술 표현 양식의 하나를 일컫는다.

입체주의라고도 한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발표된 1907년 이전까지, 입체주의라는 용어는 통용되지 않았다.


사진출처 : 나무 위키 - 15세 피카소의 유화 / 11세 피카소의 토르소 소묘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5~1906년 / 파이프를 든 소년 1905년

피카소와 마티스는 미국의 문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미국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파리로 유학 와서는 화실을 열고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돈이 많아서 예술가들의 작품을 후하게 사주거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머무를 집도 무척 싸게 빌려줬다고 한다.

마티스는 미술에서 색을 해방시키고 피카소는 미술에서 형태를 해방시켰다고 할 만큼 서로의 스타일이 극명하게 달랐다. 


앙리 마티스(Henri Émile Benoît Matisse, 1869. 12. 31~ 1954. 11. 03)는 20세기 야수파 프랑스 화가다.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1904년 무렵 피카소, 드랭, 블라맹크 등과 함께 20세기 회화의 제일보로 불리는 야수파 운동에 참가, 그 중심인물로서 활약했다. 


피카소가 그린 입체파의 선구적 그림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

프랑스 발로리스에 있는 옛 수도원은 현재 피카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 한반도의 6.25 전쟁 관련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과 평화를 기원한 <전쟁과 평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가 폴란드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를 침공했을 당시 피카소는 코타 쥐르 앙티브 해변에 머물며 평화를 갈구하는 그림을 그렸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에는 도자기 작업으로 유명한 도시 발로리스에서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벽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는 '피스 무브먼트(Peace Movement)'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이는 한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목적에서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학살>, 1952

현대미술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그린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6.25 전쟁 당시인 1951년 1월 완성, 같은 해 5월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전에서 공개된 작품이다.

임산부, 소녀 등 벌거벗은 여성들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이들을 총살하려 한다. 

양민들과 학살자들의 모습이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반공법 등에 묶여 국내서 전시되지 못하다가 2021년 5월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인투 더 미스(Into the Myth)'라는 제목으로 비로소 국내에 전시됐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  <전쟁과 평화> 중 평화(위)와 전쟁(하)

방패를 든 사람과 비둘기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저울은 정의를, 방패 아래 있는 곡식은 풍요를 상징한다. 

춤추며 피리를 부는 사람들,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한국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은 평화를 상징한다. 

피카소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반전사상을 캔버스에 가득 담았다. 

6.25 전쟁 때 사용된 총탄의 양이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총탄의 양보다 많다고 한다. 

전쟁의 강도는 점점 심해져 왔다. 

지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진행 중이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은 당시 마드리드가 배경이다.

작품 속의 풍경은 실제 벌어졌던 사건을 다루고 있다. 

1808년 5월 2일 프랑스의 스페인 점령에 대항해 스페인 반란군이 봉기를 일으키자, 그다음 날 프랑스는 그 보복 조치로 마드리드의 양민을 학살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물러난 뒤 1년 후에 그려졌다.


사진 위, <한국에서의 학살> / 아래 프란시스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년

피카소는 자신의 재능으로 행동하는 예술가다.

그는 자신만의 표현방식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했다.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할 수 있습니까?

그림은 아파트나 치장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방어를 하는 하나의 무기입니다."  - 파블로 피카소 


반전을 노래한 《전쟁 레퀴엠》(War Requiem)은 영국 벤저민 브리튼이 작곡한 성악곡이다. 

비가극 성(19세기 프랑스의 그랜드 오페라) 영역에서 그의 걸작으로 꼽힌다.

1940년, 나치 공습으로 500년 역사를 지닌 성 미카엘 대성당이 궤멸됐고 폭격 이튿날, 재건이 결정된다. 


코번트리 예술 협회(Coventry Arts Committee)는 1958년 10월, 새로운 성 미카엘 대성당의 헌당식에서 연주할 곡의 작곡을 벤저민 브리튼에게 의뢰했다. 

브리튼은 개인적으로 친구 4명을 곡으로 쓰기 시작한다. 

로저 버니는 프랑스 잠수함 승선 중 격침됐다. 

피어스 던컬리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부상을 입고 1959년 여름 자살했다. 

오랜 지인인 데이비드 길은 지중해 전투에서 사망했다. 

마이클 할러데이는 학생이었지만, 종군 중 실종됐다. 

친구들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슬픔을 가져왔고, 이 곡을 쓰는 계기가 된다. - 자료 출처 : 위키 백과


https://tv.naver.com/v/31471536


https://www.youtube.com/watch?v=GHNgfF19CTY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나우'로 아침을 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