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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day Oct 08. 2023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당신!

도시의 천변은 밤에도 빛났다.

늦은 저녁에 나선 산책, 얼마만인가!

계절이 오가는 줄도 잊은 채, 무얼 하며 살고 있는 건지.

사람들은 도톰한 긴 팔 옷을 껴입고 갈바람을 가르며 산책을 즐긴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천변 물길 따라, 짧은 가을 날도 나란히 내달린다. 

천안천 폭은 안양천이나 중랑천 폭보다 퍽 작다. 

다리의 조명도 크게 화려하지 않은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나는 쉴 새 없이 흐르던 중랑천 물처럼, 짧기만 했던 한 계절처럼, 덧없이 흘러 이곳까지 왔다. 


어둠 내리던 중랑천 장안교 둑길엔 LED 디스플레이 빔 프로젝터가 산책로를 밝혀주었다.  

산책길 위로 여러 가지 색깔의 LED 조명의 그림과 글들이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꽉 잡곤 했다. 

네 잎 클로버, 장미와 국화꽃, 눈 결정체 등은 물론 '내 존재를 아름답다'라고 치켜세우던 유혹의 글까지 날렸으니, 차마 밟고 지나가지도 못했었다.

'모든 당신'들은 각기 그  존재만으로 아름답다고 하던 행복한 속삭임에 쉽게 넘어갔다. 

그 길 위에선 모두 꽃길만 걸었다. 



붉은 장미꽃, 초록 잎사귀는 바닥 위에 뚝 떨어졌어도, 낙화가 아니었다. 

사라졌다 나타났고, 나타나선 해죽 이 웃고 다시 사라지면서 계속 꽃길로 빠져들게 했다.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던 약속조차 잊고 살았지만, 그날 지치도록 꽃길을 걷고 있었으니 됐다. 


네 잎 클로버가 무더기로 반겨주면, 행운이 아니고 행복이 된다고? 

우리는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것, 어떤 이는 평생 한 번도 기회가 없었다며 탄식하는 것만 행운이라 불렀다. 바삐 지나치며 살아온 우리는, 행운이 이렇게 한꺼번에 무더기로 찾아온다고, 절대 믿지 않았다. 

여태껏 행운(네 잎클로버)이라 믿었던 상황까지 이렇게 한꺼번에 밀려들면 행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행운이 왔다 간 것도 모르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행운은 인색하지만, 행복은 마음만 고쳐먹으면 아무 때나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고 인심 좋게 찾아오니 이도 됐다.  


노란 국화꽃의  꽃말은 짝사랑. 

한쪽만 상대편을 사랑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랑을 받는 사람도 불편하겠지?

대부분 어른이 되면, 이런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저울질 해가며,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 잘 살아왔다. 

물론, 어여쁜 노란 국화꽃처럼 평생 짝사랑을 하며 산다 해도 노란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다. 

'존재만으로도 아름다운 이들'은 살아가는 방법이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각기 다 별다르다.

남다르므로 서로 관심도 갖게 되고, 같지 않으니 호감도 생긴다.


길조로 사랑받던 까치(Black-billed Magpie)도, 이젠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흔한 텃새로 취급받는다. 

도시, 농촌, 산과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식성도 잡식성이다. 

아무거나 잘 먹는 것은 장점이지만, 왠지 귀족이 아닌 평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대부분 평민으로 살아가지만, 반려견이나 나무, 꽃, 새까지 귀족을 좋아하는 것도 시류다.  

곡식, 고구마, 곤충, 작은 동물, 과일 등 가리지 않고 먹어주는 식성을 칭찬해 주고 싶었다. 

여름엔 해로운 곤충을 잡아먹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만, 가을에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까치의 도움보다는 피해를 더 많이 기억하고 가끔 손가락질하며, 하찮게 대한다. 

땅에서는 두 발을 모으고 뛰거나 걸으며 먹이를 찾고, 놀라거나 비상시엔 뛰면서 날아오른다. 걸을 땐, 좀 경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둥근 날개를 펄럭이며 비교적 천천히 나는 모습은 우아해 보인다. 



어둠이 깃드는 천안천변을 걸을 때면, 중랑천변 LED 조명등 글귀들이 생각났다. 아직도 그대로 있는지, 더 화려한 색깔 옷으로 갈아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녀가 흰 개 한 마리와 산책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강아지의 흰털이 유난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별안간 눈 내리던 겨울밤, 눈처럼 하얀 털을 지닌 우리 스피츠 강아지 '루비'와 함께 걷던 시절이 먼 기억 속에서 달려 나왔다. 쌓이던 눈은 순백의 빛과 포근함, 부드러움으로 우리를 끌어냈다. 

열네 살이던 그날 밤, 뺨을 예이던 추위를 지금까지 잊지 못한다. 내 여린 두 뺨을 할퀴고 지나간 건, 그 흰 눈이었다.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왔지만, 꽁꽁 얼어버린 뺨은 아프기만 했다.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결정체를 숨긴 하얀 눈은 무슨 사연으로  그 긴 겨울밤을 홀로 지키고 있었을까? 

중학교 2학년 때, 루비가 죽고 난 그 겨울 이후, 난 더 이상 반려견을 키우지 않았다. 

죽음이 준 이별의 충격은 한동안 떠나질 않았고, 슬픔이 너무 커 주체하기 힘들었다.


훗날 아버지와 어머니, 이모와 이모부... 내게 소중한 이들과도 이별을 해야 했다. 

당연히 이 소중한 분들과의 작별이 더 크게 슬펐지만, 슬픔을 다스리며 담담하게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 어린 시절보다는 수월했다. 

어느새 죽음도 삶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나이가 되기도 했고, 아무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삶의  중요한 명제이기도 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이, 천변 가득 어둠이 내렸다.  

이젠, 꽃길이 아닌 포장도로를 지르밟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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