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찾아가는 천안학 강의 - 천안중앙도서관 × 천안학연구소
2022년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본적을 입적한 무호적 독립영웅 214인 중 윤동주 시인도 있다. 직계 후손이 없어 호적 등록을 못했던 윤동주의 호적 주소는 현 독립기념관 주소인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이다.
어제(16일 10:00~11:30) '2025 찾아가는 천안학' 강의를 들으려, 중앙도서관 3층 대강의 실을 찾았다. 우리 가슴속에 늘 27세(현 우리 나이로 치면) 청년으로 남아있는 동주 시인을 만나기 위해 나선 길, 아침부터 간간이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윤동주 시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작은 우산을 내리누르는 빗줄기가 기상예보대로 집중호우를 몰고 올 듯 점점 사나워졌다. 지난주 내내 목감기로 위축되어 있던 몸이 드센 맞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긍정적인 자극이라 생각하며 걸었다. 어느새 바람이 뒤에서 내 등을 힘껏 밀어준다. 변덕스러운 비바람에 화들짝 놀랐지만, 누군가 힘껏 토닥여 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17일 오전 12:00~06:13분까지 홍수 주의보에 따른 안전 문자가 19통이나 와 있었다. 산림청, 행안부, 충청남도, 천안시, 금강홍수통제소, 한강홍수통제소, 아산시, 철도공사 등에서 긴급하게 보낸 문자였다. 어제 느꼈던 비바람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이 싹 가셨다. 현재와 같은 속도로 진행되는 기후 위기 앞에서 '탄소중립, 녹색성장'의 정책 구호도 허망하게 들린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 성난 자연재해 앞에서 밤잠을 설치며 안전을 지켜내려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대처조차 눈물겹도록 초라해 보인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재해를 무사히 버텨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인 박해환의 강의는 윤동주 시인의 출생, 북간도 유년 시절, 1938년 연희 전문대 입학(3년간 서울에 머물렀던 시절), 1942년 동경 유학, 감옥 입소(옥살이까지 포함한 2년 3개월의 일본 생활), 1945년 2월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일화들로 이어졌다.
초등학생 동주가 쓴 시로는 <오줌싸개 지도>가 유명하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소설가 김송의 집(종로구 누상동)에서 문우 정병욱과 함께 3개월 정도 하숙 생활을 했다. 당시 동주 시인은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윤동주 <별 헤이는 밤>이 파란 우산 위에 떠 있다.
시를 읊조리면, 우리 마음속에도 같은 별이 뜬다.
그 별은 반짝일 뿐 아니라, 영원히 빛난다.
동주 시인은 동경 유학을 하면서 선배 정지용 시인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옥살이를 하면서 많은 시를 썼을 것으로 추측되나, 남아 있는 시는 단 5편뿐이라는 것이 크게 안타깝다.
윤동주는 강인한 저항정신, 사랑과 평화의 인류애와 인도주의적 실천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민족 시인이며, 그의 시는 항상 우리 영혼에 아름답고 올곧은 자극을 준다.
강사인 박해환 시인은 '문학 산촌'(천안 광덕 소재)에 보관 중이던, 윤동주 시인 생가인 용정에 있던 우물과 110년 된 우물 굴뚝, 초등학교 4학년 때 동주 어린이가 쓰던 등사기까지 직접 가져와 강의를 더 실감 나게 빛내 주었다. 이 우물은 서울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 있던 우물과 같은 우물이다. 원래 6칸 높이의 우물이었는데 3칸씩 2곳에 나누어져 전시 보관 중이다.
강의 중, 중국의 동북공정 관련, '윤동주 시인의 국적에 관한 논란'에 대한 진실도 함께 살펴보았다.
나는 반박할 논리를 위해 남들보다 빠른 포털 검색으로 '윤동주는 조선족 중국인'이라는 중국 측 주장을 찾아내, <별 헤는 밤> 책을 받았다. 한ㆍ미ㆍ중ㆍ일 4대 국어로 발간된 책이어서 더 뜻깊었다. 책 안쪽에 '문학 산촌' 촌장인 박해환 시인의 사인도 받았다.
이제 와, 중국은 동주 시인을 중국인으로 포장하고, 일본인들은 윤동주 시인을 사모하고 그의 시를 애송하며 시비까지 건립하고 있다.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는 그의 기상과 아름다운 시어가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이 100세 되는 해였고, 2016년~17년엔 동주 시인에 대한 행사도 많았다. 나 역시 그와 관련된 글을 몇 편 올렸었다. 그는 우리 기억 속에 항상 20대 청년 모습으로 남아있고, 그래서 더 안타깝고 애틋한 정이 솟구치곤 한다. 그가 살아있다면 벌써 108세이다. 동주 시인은 조국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늘 그의 마지막 상황이 더욱 애달프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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