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낯선 고대 희랍어에서 20년 전과 같은 상호작용 다시 기대했다.
한강은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입을 길게 닫고 침묵하는 여자, 20여 년 동안 실명이 천천히 진행되는 남자, 이 남자가 당신이라 부르는 청각장애를 지닌 그녀와의 관계 설정도 평범하지 않았지만, 여자와 남자 두 사람 사이의 매개체로 작동하는 언어가 희랍어였고, 한국과 독일이란 공간, 과거와 현재를 오가다 보니 처음부터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들긴 쉽지 않았다.
희랍어(希臘語)는 낯설었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니,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언어 하나. 그리스 본토와 튀르키예, 알바니아 등지에 사는 그리스 사람들이 쓴다.(그리스어, 헬라어)라고 되어있다.
첫 장부터 *보르헤스의 묘비명 '서슬 퍼런 상징'이 등장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장검이 놓여 있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 본문 10쪽
스위스를 여행했지만, 보스헤르의 무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느 곳에서도 사진을 찍지 않았지만, 루체른 선착장의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만에 기록했다. '소리와 냄새, 감촉 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본문 10쪽, 첫 장의 짧은 이야기 전개만으로는 상황 인지도 쉽지 않았지만, 첫 장의 주어가 희랍어 강사인 남자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08.24~1986.06.14)는 20세기 문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작품은 문학, 철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쳐 현대 문학의 형식과 개념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출처: 나무위키
희랍어 강사는 체구가 좀 작은 편이고, 눈썹과 인중의 선이 뚜렷한 삼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그는 희랍어의 격(case)을 여자에게 읽어보라고 했고, 그녀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두 번째, 다시 대답을 권하며 기다렸고, 세 번째는 '어서 말해요'라고 독촉했다. 결국엔 '에 모스, 에메 테로스. - 나의, 우리들의 ······'를 수강생들이 모두 함께 읽었지만, 여자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여자는 새 집으로 들어간 지 5개월이 되어가고 있었고, 반년 전 어머니를 여의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심리치료를 시작했는데, 심리치료사는 이와 같이 자명한 원인들을 여자가 왜 부인하려는지 납득하지 못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백지에 아니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라고 적었다. 그리고 여자는 이날 심리치료를 그만두었다. 필답으로 받던 치료는 오랜 시간이 소요됐고, 오해의 소지가 많아서였지만, 경제적으로 상담료를 낼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육 년 남짓 출판사와 편집 대행사에서 일했고, 칠 년 가까이 수도권 대학 두 곳과 예고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었지만, 원인도 전조 없이 그것(침묵)이 다시 찾아왔으므로, 모든 일들을 중단해야 했다. 여자는 수년 전 이혼했고, 전 남편과 세 차례 소송 끝에 아홉 살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다.
그것이 온 것은 여자가 막 열일곱 살 되던 겨울이었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짝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발음을 쓰기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 침묵에 싸여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 본문 18쪽
이십 년 전 당시, 방학을 앞둔 불어 시간에 '비블리오 떼끄((bibliothèque)' , '도서관'이란 단어를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중얼거리면서 소리가 들렸던 건 중요한 순간이었다. 여자에게서 그것이 간 것은 낯선 외국어 불어에서 시작됐다. 불어는 그녀의 그것(침묵)에 대한 상징적 상호작용이었으며, 20년 후 다시 그것(침묵)이 찾아왔을 때, 여자는 낯선 고대 희랍어에서 그와 같은 상호작용 다시 기대했다.
열다섯 살 초여름, 독일로 떠나기 두 달 전, 여자는 기초 독일어 교본과 회화 테이프를 사러 간 그날 밤, 문고판 <<숫타니파타>>와 <<법구경>>, <<화엄경 강의>>와 <<열반경 강의>>을 욕심껏 골랐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얇은 책을 함께 담았다.
독일에서 보낸 십칠 년 동안 여자는 그 책들을 천천히, 반복해서 읽었다.
'어떤 밤엔 그저 한글의 생김새를 들여다보고 있고 싶어서 책장을 넘기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떤 책을 펼치든 그 초여름 밤 수유리의 서늘한 공기가 팔뚝 위로 느껴졌다. 어둑한 은 숟가락 같던 달과, 신비하고도 불안한 암시 같던 보랏빛 달무리를 잊지 않은 것은 그 책들 덕분이었다.' - 본문 29 쪽
여자가 가장 좋아하게 된 책은 현암사에서 나온 <<화엄경 강의>>였고, - 그토록 찬란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사유의 체계를, 그 후 어느 책에서도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쉽고 개괄적인 내용의 보스헤르 책은 훑어보고 책장에 꽂아두었지만, 대학에 들어가 그의 소설들과 평전을 독일어로 읽으면서 이 얇은 초록색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이어서 독일어로 생명, 생명이라고 흘려썼다가 굵게 가로로 선을 그어 지운 흔적이 보였다. 분명 본인의 필체인데, 언제 그것을 적어 넣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 본문 30쪽
그 후, 희랍어 강사는 더 이상 그녀의 침묵을 지적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간이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르었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고어를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 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 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의 유럽어는 그 오랜 과정을 거쳐 덜 엄격하게, 덜 정교하게, 덜 복잡하게 변화한 결과물입니다. 플라톤을 읽으면, 수천 년 전 정점에 이르렀던 고어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을 겁니다 ······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 본문 32~33쪽
그녀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집중하지 못한 채, 자신이 사용한 단어들의 형상을 들여다보다가 때때로 입술을 열어 그것들을 읽을 때가 있었지만, 이내 읽기를 멈추고 마른침을 삼키곤 했다. '베인 곳을 바로 눌러 지혈하거나, 반대로 힘껏 피를 짜내 혈관 속으로 균이 들어가는 걸 막아야 할 때처럼. -본문 34쪽
희랍어 강사인 남자는 독일 병원 2층에 딸린 가족의 살림 집에 살았던 '당신'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 가족은 아직 그 병원 이층에 살고 있는지 ······ 당신은 병원 집 딸이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안과 의사였고, 엄마는 아름다운 벵골인이었다. 당신은 갓난아이였을 때, 열병을 앓다 청력을 잃었다. 이태 전, 특수학교를 졸업한 뒤 병원 건물 뒤쪽 창고에서 목가구를 제작하며 지내고 있었다.
남자는 열일곱 살, 그 해 6월 그 병원에서 처음 진료를 받았다. 이때부터 남자의 시력은 이미 불안정했다.
당신 아버지는 섣부른 안과 수술은 오히려 실명을 앞당길 뿐이라는 임상 결과들을 남자에게 설명하며, 값싼 동정심을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가 예고한 마흔 살이 다가오고 있지만, 남자는 아직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더디 진행되어 온 일이므로, 마음의 준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서울에서 사설 아카데미 희랍어 초급반과 플라톤 원전을 강독하는 중급반을 가르치고 있다.
비로소 세 사람의 연결고리와 희랍어가 주는 상징적 의미가 느껴졌고 등장인물에 관한 텅 빈 여백이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먼저, '여자'로 등장한 당신은 네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칠 만큼 예민한 언어 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슨 연유에서 인지 열일곱 살에 갑자기 그것(침묵)이 찾아왔다. 20년 후에 다시 말문이 막히는 그 증세가 찾아왔다. 침묵하는 여자는 이혼한 전 남편으로부터 아홉 살 아들의 양육권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희랍어를 배우고 있다.
'남자'로 표현된 당신은 열다섯 살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그곳에서 십육 년을 보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남자는 부계 유전으로 인해 열일곱 살 때부터 서서히 눈이 멀어갔지만, 20년 후인 지금까지 아직 실명 상태는 아니다.
'당신'은 '남자'가 사랑한 첫사랑으로 청력을 상실하고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간다. 현재,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며 2살 된 딸을 키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남자와 첫사랑 당신)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 본문 53쪽
남자의 동생(란아) 말고, 유일하게 이름을 지니고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남자의 동성 친구인 '요아힘 그룬델'이다. 남자는 그의 동성애 성향으로 그를 떠나, 혼자 스위스를 여행했다.
희랍어를 전혀 모르는 독자도 이제 다섯 사람 사이(관계)를 들여다보게 되니, 좀 더 여유롭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인물의 구성과 이야기의 줄거리에 쫓기던 조급함이 사라지면서 희랍어가 지닌 상징성으로 그 축이 천천히 넘어갔고, 어느새 책장마다 담긴 한강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장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희랍어는 서양 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 언어로 오랜 역사와 철학, 문학의 유산이 담겨있지만, 지금은 사멸된 낯선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완성도 높았던 희랍어가 지닌 신비로운 힘에 주목하고 있었다. 희랍어는 수동태와 능동태 말고도 제3의 '중간태'가 있어, 주어를 따로 쓸 필요도, 어순을 지킬 필요도 없이 중간태에 따라 변화된 단어가 그 의미를 압축하고 있었다. 저자의 섬세한 심리적 표현, 꼼꼼한 필력 때문인지, 희랍어의 발음과 문법, 언어로서 역사적 가치 등이 문외한에게도 흥미와 관심을 북돋아 주었다.
여자는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의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여자)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긴 문어체의 문장으로, 유도하는 구어의 생명을 없애며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평소보다 커졌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도록 점점 사변적(思辨的)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 본문 62쪽
여자의 그것(침묵)이 나타나는 원인을 어렴풋이 전달받은 느낌이 들었다. 뱉어낸 언어가 나란히 배열되어 원하는 글로 담기지 않을 때, 작가로서의 상실감 같은 것이 전해졌고, 어쩜 쓸데없는 언어를 구사하는 관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특히 여자는 태생적으로 언어에 민감성이 높은 사람이었고.
희랍어 강사가 여동생 '란아'에게도 편지를 썼다. 남자는 어린 시절 계집애 같은 오빠였고, '란아'는 고집불통, 기차 화통, 마치 사내 같은 동생이었다. 남자는 동생이 편지와 시디를 보내준 것에 대한 답장을 보냈다. 안부를 물었고, 자신은 믿을 만한 의사에게 정기적으로 진찰을 받으며, 제때 음식을 만들어 먹고, 맨손체조와 골목 산책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일상을 전했다. 또 한국에서 어린 시절에 살았던 '수유리 옛 우리 집'을 찾아갔던 이야기도 전한다.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면, 가족이든 남이든 대부분 각기 다른 공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공유했던 경험의 어떤 부분은 기억 속에 선연하게 담겨있다. 시력을 상실해 가는 사람도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썼고,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도 생각을 따라가며 지속적으로 글로 남겼다.
<<희랍어 시간>>의 사람 사는 이야기가 얽히고설켜 가는 것이 흥미롭다.
시력을 상실해 가는 남자와 가족들이 독일로 가기 전 살았던 곳이 서울 수유리였다는데, 그것(침묵)이 찾아온 여자도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수유리 집에서 살다 독일로 떠났다. 또 남자는 사랑했던 당신이 청각장애인이었기에, 수강생인 여자가 희랍어를 열심히 배우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못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자신의 시력상실 상황을 알게 된 것도, 여자가 그것이 찾아온 것도 독일에서 각자 열일곱 살 때였던 것도 아직 다 알 수 없는 관계 설정으로 느껴졌다. 저자는 시공간의 틈을 두고 이어지는 인연의 끈으로, 여자와 남자의 상황(狀況)과 현상(現像)을 풀어가고 있었다. 현재, 남자와 여자는 희랍어를 매개체로 삼아, 겉으로 보기보다 더 치열하게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아니 자기만의 영역을 치열하게 지키고 있다고 해야 할까.
남자는 스스로를,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것,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란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 걸. 타고난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라고 생각했다.
'밤은 아까보다 더 깊어졌어.
네 목소리가 정적 속에 스며들어서,
이 정적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진다.
동이 트려면 세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겠지.
그때까지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
이제 스탠드를 끄면 어둠이 찾아오겠지.
눈을 감는 것과 뜨는 것이 거의 다르지 않은, 먹보다 진한 내 눈의 밤이.' - 본문 93쪽
매일 밤, 남자는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껐다.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그의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것이다.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빛에 얼굴을 담글 생각만으로도 남자는 가슴이 떨렸다.
이 세계는 덧없고 아름답지만, *플라톤은 덧없고 아름다운 세계가 아니라, 영원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원했다고 한다 ······ 아름다운 사물을 믿으면서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은 사람은 꿈을 꾸는 상태에 있는 거라고 플라톤은 생각했고, 그걸 누구에게든 논증을 통해 설득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세계에선 그렇게 모든 것이 뒤집힌다. 그는 자신이 오히려 모든 꿈에서 깨어난 상태에 있다고 믿었다. 현실 속의 아름다운 사물들을 믿는 대신 아름다움 자체만 -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 믿는 자신이. - 본문 105쪽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428?~B.C.347?).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생애를 교육에 바쳤다. 대화편(對話篇)을 다수 썼고, 초월적인 이데아가 참 실재(實在)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전개하였다.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 국가의 사상으로 유명하다. 저서에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국가≫ 등이 있다.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희랍어 시간이 끝나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자는 어두운 거리를 혼자 걸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서 번화가 거리 빌딩 꼭대기에 설치된 거대한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실제보다 수십 배 확대된 얼굴들이 거대한 입술을 움직여 들리지 않는 말을 했고, 거대한 활자들이 물고기처럼 입을 달싹이며 화면 아래를 흘렀다. 거대하게 확대된 뉴스 화면들, 들것에 실려가는 시체, 군중, 불붙은 비행기, 울부짖는 여자들이 급히 지나갔다.
'······ 여자는 초등학교 시절에 만들었던 만화경이 생각났다. 한쪽 눈을 대고 만화경을 흔들 때마다 펼쳐지던 이상한 세계에 사로잡혔었다. 말을 잃은 뒤, 이따금 그녀의 눈앞에 그 세계가 겹쳐 떠오를 때가 있다. 녹초가 된 채 버스에 실려 검고 단단한 숲 같은 밤거리를 흘러갈 때. 아카데미 건물의 어둡고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갈 때. 긴 복도를 건너갈 때. 오후의 햇빛과 정적과 나무들, 잎사귀들, 노란빛 무늬들을 바라볼 때, 타닥타닥 터질 듯 깜빡이는 네온사인과 색전구들 아래를 걸어갈 때. 말을 잃고 나자 그 모든 풍경이 조각조각의 선명한 파편이 되었다. 만화경 속에서 끝끝내 침묵하던, 무수한 차가운 꽃잎같이 일제히 무늬를 바꾸던 색종이들처럼.' - 본문 112쪽
오랜만에 한가했던 일요일 오전, 일곱 살이던 여자의 아들은, 자신의 인디언식 이름을 '반짝이는 숲'이라고 지은 뒤, 여자에게도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조각난 기억들이 움직이며 무늬들을 만든다.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조각조각 흩어졌다가 한순간 단호히 합쳐진다. 무수한 나비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멈추는 것처럼. 얼굴을 가린 냉정한 무희들처럼 - 본문 113쪽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는다.
감정을 부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파편으로 다가와,
파편인 채 그대로 흩어진다. 사라진다.
단어들이 좀 더 몸에서 멀어진다.
거기 겹겹이 무거운 그림자처럼,
악취와 오심처럼,
끈적이는 감촉처럼 배어 있던 감정들이 떨어져 나간다.
오래 침수돼 접착력이 떨어진 타일들처럼.
자각 없이 썩어간 살의 일부처럼. - 본문 115쪽
여자는 잠든 아이의 눈꺼풀에 조심스럽게 입 맞춘다. 나란히 누워 눈을 감는다 ······ 밤이 끝날 때까지 그녀에게는 말도 없고 빛도 없다. 모든 것이 펄펄 내리는 눈에 덮여 있다. 얼다가 부서진 시간 같은 눈이 끝없이 그녀의 굳은 몸 위로 쌓인다. 곁에 누운 아이는 없다. 싸늘한 침대 가장자리에 꼼짝 않고 누워, 수차례 꿈을 일으켜 그녀는 아이의 따뜻한 눈꺼풀에 입 맞춘다. - 본문 116쪽
<<희랍어 시간>> 13장부터, 3인칭으로 불리면 등장하던 인물의 호칭이 1인칭 '나', 2인칭 '너'로 바뀌었다.
저자는 독자의 혼란이나 착각을 배려하지 않았는지, 나만 그랬던 것인지. 나와 네가 헷갈리기도 했고, 특히 '나'가 누구인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암튼 문장과 문맥을 다시 꼼꼼하게 읽고 나서야 '나'는 '남자'로 불리던 희랍어 강사로, 너는 그를 사랑했던 동성친구인 '당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 동트기 전,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와 내 어깨를 건드리고는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다. 백지를 펼쳐보니 점자로 쓴 편지였다. 신중하게 문장들을 더듬었지만,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점자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뜨고 있는 꿈을 꾸다가 문득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고통도, 상실감도, 체념도 느끼지 않는다 한 번 더 빠져나갈 꿈밖의 세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본문 119쪽 요약
독자에겐, 아직 점자를 배우지 않았다는 '나'의 단서가 혼란을 부추겼지만, 꿈에서라면 점자를 읽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어떤 의혹이 들어도 계속 읽다 보면 그 상황이 정리되곤 하는 데, 이야기에 몰두하다 보면 작은 기다림에도 은근히 조바심 날 때가 있다.
남자는 서른일곱 살, 요아힘 그룬델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었다. 점자 편지의 마지막 글자까지 손끝으로 훑었다. 장례식은 여섯 시간 후에 치러진다는데, 남자는 그 먼 곳까지 갈 수 없었다. 친구 어머니에게 독일에 돌아가면 인사드리러 가겠다고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요아힘 그룬델의 어머니는 물론이지. 너는 언제든 환영이란다.라고 말씀하셨다.
······ 그렇게 산을 내려온 지 열흘이 지났을 때, 너(요아힘 그룬델)는 나(현, 희랍어 강사)에게 물었다. 왜 철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고대 희랍인들에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 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는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 126쪽
나는 수년 후, 너와 결별하고 혼자 스위스 여행을 하게 된다.
<<희랍어 시간>> 본문 10쪽, 첫 장에서 혼자 스위스를 여행했던 짧은 기록 속 남긴, 남자의 두 눈 속에 담겼던 루체른 선착장의 풍경들이 독자에게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14장 <얼굴>에서 나는 너와의 지난날들을 회상하며 추억에 젖었다.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고 느낀다.
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 본문 130쪽
내가 던진 모든 질문들을 너는 명쾌하게 풀어갔지만, 나는 네가 던진 질문들에 늘 길을 잃곤 했다. 틀렸어.라고 너는 말하곤 했다. 긴 논쟁이 마무리 지어질 때쯤이면 덧붙여 말했다. 아무래도 넌 문학을 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넌 까다로운 친구. 지독히 까다로운 동갑내기 스승이었다.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 본문 129쪽
여름휴가의 피크를 앞둔 목요일 여덟 시 십오 분경, 금요일 수업은 휴강됐고, 아카데미 사무실을 지키는 아르바이트 생은 강의실 문만 열어두고 일찍 고향에 내려간다고 했다. 다른 수강생들은 기척도 없는데, 강의실엔 방금 발자국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간, 침묵을 지키는 그 여자만 있었다.
한 마리 박새가 제 스스로 건물 안으로 들어와 밖으로 나가질 못하고 당황하여 삐이 삐이 대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시력이 상실되어 가는 남자는 아래로 날아가 벽에 부딪히던 박새를 도와줄 생각으로 지하로 내려갔으나, 새는 오히려 놀라서 그의 얼굴을 공격했다. 안경이 깨어졌고, 오른쪽 손끝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날카롭고 따뜻한 감각에 그는 아랫입술의 안쪽을 문다. 테가 휘어지고 양쪽 렌즈가 부서진 안경을 다치지 않은 왼손으로 더듬어 샅샅이 느꼈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누구의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강의실에 혼자 와 있는 그 여자에게 도움을 전할 수도 없었다. 그 여자는 소리를 듣지 못하니까.
남자는 철로 된 난간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무거운 가방으로 연거푸 쳤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진동은 느끼리라 생각하면서··· 어둠 속에서 그녀가 내려와 멈췄다. 그는 위에 다른 사람은 없나요? 안경이 깨졌어요. 나는 시력이 아주 나쁩니다. 누구든 불러주겠어요? 택시를 잡아야 해요. 안경점이 문을 닫기 전에. 내 말을 들을 수 있어요? ··· 그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팔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랐다. 그가 발을 헛디딜 때마다, 그의 몸을 붙든 팔에 힘이 실렸다.
그녀는 다치지 않은 그의 왼손을 끌어다 잡았다.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검지 끝으로 그의 손바닥에 또박또박 썼다.
먼저
병원으로
가요.
남자는 혼자 너무 오래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지금, 택시를 부르겠어요?
아니요.
첫 버스를
타고 갈게요.
여자는 그의 왼쪽 손바닥에 이렇게 글을 썼다.
195쪽에 등장하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는 87세의 보르헤스와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티마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그녀는 보르헤스와 결혼해 보르헤스의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희랍어 시간>> 1장 9쪽에서 맨 처음 언급된 사람들이었다. ······ 늙은 남자는 오랜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의 입술로, 혀로,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라고 독촉했다.
남자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여자는 듣기만 했으나, 필요한 의사 표현은 그의 다치지 않은 왼 손바닥에 썼다.
안경점이
문을 열
시간이에요.
촉감에 따라 그는 문장을 읽었다.
혹시
처방전을
가지고 있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해의 숲>은 시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남자가 쓴 시로 보인다.
바다의 매우 깊은 그곳에는 햇빛이 거의 닿질 않는다.
그 심해는 남자의 상황을 대변해 주었다.
숲은 여자가 가장 아꼈던 단어이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 ㅡ ㅜ ㅡ 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 나오는 느낌을 여자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렸다.
독자는 실명을 앞둔 남자와 침묵을 지속하는 여자의 어쩌지 못하는 상황을 품고, <심해의 숲>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시를 끝까지 읽고 나니, 1장 10쪽 첫 줄의 한 문장을 그대로 다시 옮겨와야 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침상에서 보낸 첫 밤이자 마지막 밤, 새벽이 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던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남자와 여자 사이에 놓여 있던 '서슬 퍼런' 칼날 역시 실명을 상징하고 있었다.
남자는 결국 자신의 실명을 받아들일 것이다.
<<희랍어 시간>>은 각 장이 번호, 번호와 제목으로 혼재되어 있다. 물론 이야기의 구성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독자들은 책을 어느 정도 읽어내리기까지 이런 시공간의 교차로 많은 혼란을 겪으면서 여러 번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했다. 왜, 저자는 1장부터 시작한 글을 21장 '심해의 숲'으로 이야기를 마치면서 끝장을 22장이 나닌, 굳이 0장으로로 맨 끝장으로 마쳤을까, 아니 시작하려는 것이었을까? - <<희랍어 시간>>의 이야기는 상실로 시작해서 소통을 거쳐 구원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 앞에는 각기 실명과 침묵의 긴 칼날이 세상 사이에 아주 길게 가로 놓여 있었다.
여자는 길게 다물어진 입술이 열려야, 아들의 양육권을 다시 찾아올 수 있을 텐데······
* 장편 소설 <희랍어 시간>은 << 디 에센셜: 한강>> 책 처음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