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 당신이 쓴 모든 것도....
<<파란 돌>>이야기는 현재와 과거, 현실과 꿈 사이를 계속 오간다.
잠깐이라도 그 사이를 놓치면, 다시 앞장을 뒤적여야 했던 독자에게, 이 이야기는 얄팍한 쪽수와 상관없이, 만만치 않은 생각과 많은 상상을 끄집어내야 하는 은근한 압력을 느끼게 했다.
각진 노끈을 둘둘 타래 지어 셔츠 앞주머니에 넣고 뒷산에 오르기도 했던 현실의 당신을 지켜준 것은 천식을 앓고 있는 6살짜리 아들이었다. 당신은 금세 어린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로 돌아와야만 했다.
당신은 사랑하지 않는 남자 곁에서 살기 힘들었던지, 아님 사랑하는 당신 곁으로 가고 싶었던지, 그 마음을 다 읽어내긴 쉽지 않았다.
당신이 오랜만에 다시 불러본 그에게,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 닿던 순간, 아마도 그는 크게 상심하며 뜨거운 심장이 아팠을 것이다.
······· 결국 당신은 각진 노끈을 사용하지 못한 채, 두 달 뒤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으며,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당신의 마음은 어느 정도 정리된 것일까?
당신이 그에게 제법 긴 안부를 전하는 그 사이 당신은 현재와 과거를, 현실과 꿈 사이를 계속 오가고 있었다. 그 오가는 사이가 바로 <<파란 돌>>의 이야기이다.
그는 당신 친구의 외삼촌이었고, 혈우병(책 속에 병명이 나오진 않음)을 앓고 있는 화가였다. 당신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대학을 가면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기도 했다.
'당신은 나무나 새, 사람을 그리지 않았지요. 폭발하거나 새로 태어나는 별 같던 그 형상들이 아마 당신의 얼굴이었나 봅니다. 검은 먹을 입힌 이합 한지 가운데에 원반 모양의 두툼한 종이죽 덩어리를 붙여놓고, 당신은 커다란 정원용 스프레이로 그 위에 흠뻑 물을 뿌렸지요.' - 본문 249쪽
당신이 열일곱 살 겨울, 처음으로 그린 나무를 보고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라며, '네가 그리는 모든 게 실은 네 자화상이야'라고 말했던 그.
당신의 아저씨가 당시 그린 그림을 감상해 본다.
그는 '물이 그린 거지. 난 잘 흘러가게 터주고 막아주고 한 것밖에 업어. 식물 키우는 거랑 비슷한 거야.라고 자신의 그림에 대한 말을 했다.
'나는 성운의 불길처럼 하얗게 타오르는 당신의 그림 가까이로 가 섰습니다. 당신은 삼투압과 모세관현상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해 주고는, 콩알만 한 종이죽 뭉치에 물을 흠뻑 적셔 그림에 붙이면 그 부분의 밀도가 높아져 그쪽으로는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에는 모세혈관들 같은 무수한 섬유질의 길들이 있는데, 그 길들을 따라 퍼져가는 먹의 모양을 그렇게 해서 잡아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당신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와 종이의 핏줄들을 타고 흐르는 것같이 느껴진다고 했지요.
일 밀리미터의 두께도 안 되는 한지가 마치 끝없는 깊이를 가진 듯 물과 먹이 흐르는 공간이 된다니, 어쩐지 나에게는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 본문 255쪽
당신은 여전히 '적적할 때 나무를 세어보고, 쑥스러울 때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잘 지내고 있다고 그에게 전한다. 그도 잘 지내고 있는지, 안무를 묻는 당신에게, 그는 검은 하늘에 파랗게 빛나는 별 같은 존재가 아닐는지
······· 어느 날 오후 내내, 당신은 베란다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벌서 듯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의연한 밤의 나무들은 검어진 잎사귀의 제 빛을 감췄고, 밑동은 완강한 어조의 말들을 껍질 속에 숨긴 듯했다.
이제 현실의 당신은 예전 그에게 보여준 그림들처럼 보이는 대로 형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래도 당신이 그린 나무를 그가 본다면, 나무가 너를 닮았구나, 하고 말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당신은 아직 그것을 그릴 수 없었다. 아직 일 년을 돌아왔을 뿐이니까.
당신은 아직 각진 노끈을 서랍에서 꺼내 버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일 년 가까이 그건 당신 방에 숨어 있던,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잔인한 사람 같았다.
당신은 처음 그것을 적당한 길이로 끊으며 들었던 생각이 났다. 모서리가 각이 져서 살에 파고들 때 아프겠구나, 하던.
당신은 아직도 노끈은 물론, 비슷한 형태의 긴 끈들을 견디기 어렵다.
아이의 리본체조 끈만 봐도 소스라치며 뺏어다 높은 선반에 올려놓을 정도다.
아이는 리본 끈을 무서워하는 엄마를 보며, '호랑이가 무섭지. 끈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 나는 하나도 안 무서운데.' 의기양양하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신이 회상하는 당신의 첫사랑 속엔 그의 꿈속에 나타났던 '파란 돌'이 함께 등장한다.
그의 손등엔 늘 작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너만 한 나이였어. 스테로이드 제재로 이 년 넘게 치료해도 듣지 않고, 부작용으로 온몸은 씨름선수처럼 부풀어 올랐지. 그렇게 육중한 몸으로 상처를 내지 않으려고 절절매며 목숨을 무지하고 있다는 게·······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라구,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걸어갔지. 개울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물이 맑은데, 돌들이 보이더라구.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정말 예뻤지. 그중에서도 파란빛 도는 돌이 가장 마음에 들어서 주우려고 손을 뻗었어.
당신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벽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검은 우주 공간에서 방금 폭발했거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별의 형상을, 그러니까, 당신의 얼굴을.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 본문 268쪽
당신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그의 '파란 돌'을 생각했다. 그의 파란 돌은 당신에게도 삶의 존재 의미를 주었다. 그는 꿈속에서, 죽은 후 가벼운 몸으로 걷던 냇가에서 파란 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당신에게도 그 파란 돌은 희망의 불씨와 같았으며, 당신과 그의 시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짧은 생을 불치병으로 고통받다 간 그는, 매일 밤 당신의 하늘에서 파란 별이 되어 떠있었다.
파란 돌은 당신에게도 삶을 지켜주는 빛이었고, 당신에겐 6살짜리 아들도 있질 않는가.
당신은 육체의 고통, 상실의 아픔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갈 것이고, 이 이야기를 마주했던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한강은 십 년 전 꿈속에서 보았던 파란 돌을 토대로 이 단편소설 <<파란 돌>>과 시 <<파란 돌>>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단편소설은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