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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능선』- 한강의 단편소설

고향의 진달래 능선은 정환에게 치유와 용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by Someday

한강의 단편소설 『진달래 능선』 정환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아홉 살 되던 초봄, 정환은 매일 두들겨 맞고 살던 어머니와 백치스러운 동생 정임이를 버려둔 채 고향을 도망쳐 나왔다. 그날은 새벽도, 소도시의 산자락에 들어선 집들 사이로 더디게 찾아들었고, 진달래 능선이라 부르던 뒷산 기슭은 봉화처럼 타오르는 꽃불로 보였다.


픽사 베이 픽셀스 무료 이미지로 편집한 진달래꽃 능선

어린 정환이 텃세를 피해 구걸 다니던 버스 안에서 동전을 요구하기 위해 내민 팔목을 그(양부가 될 사람)가 움켜쥐었다. 정환이 양부(養父)를 처음 만난 것은 그렇게 고향을 달아나 중소 도시에서 중소 도시로 일 년간 전전한 뒤, 한 버스 안에서였다.

양부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죽을 때까지 정환은 자신이 두고 온 고향과 식구에 대해서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양부의 장례는 정환이 대학을 졸업한 뒤 이등병으로 연병장을 구를 무렵에 치러졌다.

특박을 받고 나온 정환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그의 아들딸들이 양부의 농장에 모여든 것을 보고 놀랐다. 쉰 명도 더 되어 보이는 형제 중에는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았지만 그들은 쾌활해 보였고, 얼굴엔 어딘가 동질감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양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정환은 양부를 미워하지 않았으나, 사랑하지도 않았다.

조숙하고 비뚤어진 내면을 지녔던 정환에게 양부는 그저 세상 한구석에서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양부의 장례 후, 육 개월이 지나 첫 휴가를 받은 정환은 십수 년 동안 돌아갈 생각을 품어보지 않았던 고향이 생각났다. 정환은 진달래 능선이 있는, 어린 시절 기억이 악몽처럼 남아있는 고향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15년 전에 돌아가셨고, 재가했다는 어머니와 동생 정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어머니 성이 최(崔)라는 것과 연전에 어머니가 숙모를 딱 한 번 방문했을 때, 반편이던 정임이가 조금씩 나아져 중학교도 졸업했다며 놓고 간 정임이 사진을 받아올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두 사람의 소식을 듣거나 찾을 수는 없었다. 정환은 어머니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고, 정임이란 이름도 집에서만 부르는 이름이었는지도 몰랐으며, 개가 후에는 어머니도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은 꿈이었다고. 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한갓 꿈이었다고 생각하려 정환은 애썼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진이 있었다. 그들이 살아 있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어딘가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잠자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것이 있는 한 정환은 완전한 체념을 할 수 없었다.' - 본문 245쪽


아홉 살에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에서 마주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정환을 더 혼란스러운 감정에 놓이게 했다. 진달래 능선은 정환의 내적 갈등과 단절되었다고 생각한 과거와 정리되지 못한 현재의 감정 상태를 암시적으로 나타내면서도, 치유와 용서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정환은 붙박이 직장을 구했을 때, 지칠 만큼 지쳐있었고, 원인이 불분명한 위장 질환을 앓고 있었다.


정환은 직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변두리에 싼 보증금의 월세방을 얻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묻지도 않은 집주인의 이야기를 정환에게 들려주며, 따로 생활비 나올 곳도 없는 사람이니, 월세를 꼬박꼬박 잘 챙겨주라고 했다. 예전에는 이 근방에서 제일 좋은 집이었고, 나무도 무성해서 정원이 아니라 숲 속 같았단다. 그때는 쓸 만한 사람이었다는데·····

이제 겨우 마흔이라는 집주인 황 씨는 아내와 두 남매가 있었는데, 손위 딸아이는 심장병을 앓았다.

어느 날, 아내가 성한 아들만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고, 황 씨는 딸을 먼 친척에게 맡겨두고 꼬박 한 해 동안 아내와 아들을 찾아 헤맸으나, 빈손으로 돌아와서야 딸의 병이 위급해진 것을 알았다.

병원 치료비로 재산을 다 까먹은 어린 딸은 삼 년 전에 죽었으며, 황 씨는 그 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황 씨는 말없이 떠나간 아내와 아들에 대한 상처보단, 짧은 생을 심장병으로 힘들어하다, 저세상으로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이 더 가득 차 보였다. 황 씨는 매일 밤, 나무를 한 그루씩 뿌리째 뽑아, 깊게 판 구덩이에서 불태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한없이 넓고 황량한 벌판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에 그 아이가 서 있소.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오······· 하긴 살았을 때도 말은 많이 하지 못했지, 숨이 차서, 늘 짧고 간단하게 말해야만 했다오."

정환은 여자아이의 그림자가 모닥불 속에서 불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날름거리는 불꽃이 몸뚱이를 핥을 때마다 아이는 들리지 않는 비병을 지르며 나무뿌리 속으로 사위어 갔다.

"언제나 깜박 잠이 들 무렵이면 녀석이 거기 서 있는 거요. 아부지 여긴 춥구 나무 한 그루 없어요.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말이오. 그때마다 난 말하오. 그래 보내주마 네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 한 번도 그 사이로 뛰어다니지도 못한 네 나무들을 보내주마 하고·····" - 본문 259쪽


황 씨 가족들도 모두 도망치듯 떠났다.

병마와 싸우다 짧은 생을 마친 딸도 그에게서 떠나긴 마찬가지였다.

딸의 죽음이야말로 황 씨에겐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황 씨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이승에서의 일은, 딸이 좋아하던 널따란 정원에 있던 모든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불을 태워버리는 것뿐이었다.

작품 속에서 황 씨는 아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보인 바 없지만, 아내의 행동 역시 그에겐 치유되기 힘든 배신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아픈 딸을 잘 보살펴가며 가정을 지키지 않은 것이 크게 아쉬웠고, 그녀 역시 혼자 마음 편하게 잘 살면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 아들은 아빠와 누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아내는 가족의 테두리를 그렇게 함부로 뭉개버려도 되었던가?'


한강은 단편소설 『진달래 능선』에서도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문체로 심리적인 갈등을 겪는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 『진달래 능선』은 『여수의 사랑』 책에 담긴 5번째 단편소설이다.


한강은 만 23살에서 24살이던, 193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책 속"에 담긴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을 집필했다. 2007년 개정판을 내며 한 번 손을 보았음에도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 2018년,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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