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규에게 달리기란, 암담한 현실과 내면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의 몸짓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 인규에게 전화를 걸어대던 어머니가 돌연이 연락을 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처음엔 홀가분했던 인규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에 사로잡힌다. 줄곧 전화벨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인규는 이날 저녁 붐비는 지하철과 버스에 시달리며 의붓아버지의 지물포에 찾아갔다.
"왜 진작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단신에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이 주먹만 한 의붓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 사람이 자네한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어."
의붓아버지는 계산대에 앉아 지폐 뭉치와 잔돈을 모조리 펼쳐놓은 채 이날의 장부를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어디 있느냐는 인규의 물음에 의붓아버지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내일로 수술 일정을 잡아두었음을 실토했다. - 본문 23쪽
그는 어머니가 입원한 대학 병원의 병동과 호수를 일러주며, 지금 가보았자 면회는 안 될 거라고 했다.
"이렇게 보호자도 없이 입원실에 내버려 둬도 되는 겁니까?
"난들 오늘 밤 병원에 있고 싶지 않았겠어? 그 사람이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별수 없이 쫓겨 온 거야.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 봤다구. 아이 낳을 때도 신음 소리 한번 안 낸 사람이라면서 큰소리까지 쳤다.
"너야말로 별나게 구는구나. 네가 언제 네 에미한테 관심이나 있었더냐?"
더러운 수전노. 인규는 입술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욕설을 삼켰다. - 본문 203쪽
가게를 나섰을 때, 이미 밤은 깊어 있었다.
변두리에서 시내로 나가는 버스와 지하철은 모두 끊겨 있었다.
인규는 택시를 잡는 대신 두 주먹을 쥐고, 이를 아물고 한참을 달렸다.
인규에게는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는 버릇이 있었다. 다섯 손가락의 매듭이 으스러지도록,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얼굴을 갈 길 것처럼 그는 주먹을 쥐고 다녔고 이로 인해 손바닥에는 오 밀리미터 가량 면도칼로 그어놓은 것 같은 두 개의 흉터가 생겼다. 이따금 통증 때문에 손을 벌려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인규는 중지와 약지의 손톱이 생명선 근처에 핏기 어린 두 개의 금을 그어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해독할 수 없는 무수한 운명의 잔금들 사이로 새겨진 붉은 흉터는 불길한 예시처럼 인규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곤 했다. - 문 204쪽
올 들어 서른 살이 된 인규는 '질주'하는 습관으로 치아까지 부실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떡니부터 어금니까지 가볍게 밀고 당기기만 해도 모조리 건들거리곤 했다. 얼굴엔 혈색이 돌지 않았고, 뺨은 움푹 패었으며, 눈동자는 퀭한 눈두덩 속에서 비정하게 빛났다.
인규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고교 시절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일등을 하곤 했던 달리는 일이었고, 지금도 매일 뒷산 등산로를 달리고 있었다.
인규에게 달리기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암담한 현실과 내면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의 몸짓이었다. '질주'는 단순한 행동이 아닌,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과 자유를 향한 갈망이기도 했다. 누구로부터도 통제받지 않는 인규의 질주 본능은 답답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
*떡니: 앞니의 가운데에 있는, 위아래 두 개씩의 넓적한 이.
인규네 가족은 인규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시골에서 살았다.
인규 아버지는 사이다 병에 담아놓았던 농약을 들이켜고 죽었다. 어머니는 서른다섯 살, 인규는 열한 살, 동네북이던 연약한 동생 진규는 여섯 살 때 일이었다.
아버지가 남겨 놓은 논마지기가 꽤 있어서 어머니의 개가는 어렵지 않았고, 홀아비였던 지금의 의붓아버지를 만났다. 의붓아버지는 논을 팔아 읍내에 하나뿐인 지물포를 인수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즈음이어서 금고 속엔 지폐가 쌓여갔다. 이즈음 진규가 동네 아이들에게 맞아 죽었다.
인규는 진규의 복수를 시작했고, 동네 녀석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 댔지만, 동생 진규를 잃은 아픔은 조금도 치유되지 못한 채, 인규를 우울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다. 인규가 초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일가족은 고향을 등지고 상경한다. 의붓아버지는 서울 변두리에 새로 지물포를 차렸고, 시골 읍내보다 수입이 좋았던지 살림은 날로 불어났다. 어머니도 도회 아낙이 되어갔고, 의붓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누이동생은 서울말을 쓰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은 까마득히 잊혀 갔다.
인규의 '질주'는 몸을 통해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규의 차가운 성격은 고독과 무관심한 일상으로 이어졌고, 인규의 삶 속에서 어린 동생 진규의 모습은 마음속 깊은 곳에 크고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억눌린 감정과 삶에 대한 저항은 내면의 고립감을 가져왔다.
계속 달리다 보니, 어느새 어머니가 입원한 대학 병원에 닿았다. 병동 8층에 어머니가 누워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인규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인생은 그의 상처 난 손바닥 안에 있었다. 그의 운명도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을까?
인규는 병동 로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친 발이 자꾸만 허공을 헛디뎠다. 공기가 춤을 추었다. 숨이 차 오기 시작했다. - 본문 226쪽
책 『질주』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여운을 남겼다.
"우리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질주>>의 인규도 <<여수의 사랑>> 정선과 자흔, <<어둠의 사육제>> 영진과 명환, 인숙 <<야간열차>> 동걸과 동주, 영현처럼 가족이 평범한 구성원이기보단 상처와 무거운 짐이었다.
인규는 삶에 대한 피로와 공허를 육체적 고통을 통해서라도 잊고자 했다.
그는 ‘질주’를 통해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외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이것뿐이었을까?
인규는 구속과 자유, 억압과 해방이라는 다면적 갈등 속에서 항상 외로운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 『질주』는 『여수의 사랑』 책에 담긴 4번째 단편소설이다.
한강은 만 23살에서 24살이던, 193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책 속"에 담긴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을 집필했다. 2007년 개정판을 내며 한 번 손을 보았음에도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 2018년,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