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목선, 녹슨 붉은 닻은 수많은 운명들의 잔해 같았다.
『붉은 닻』의 줄거리는 짧고 명료했지만, 한 가족인 네 사람의 심리적 상황은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갈등과 상처를 내포하고 있어, 결코 가볍게 읽어 내릴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리송한 결말을 독자의 상상 속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상황도 개인적으론 썩 유쾌하지 않았다.
동식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끝내 알 수 없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허망했다.
'······· 동식이 아는 아버지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통해 단 한 가지 실제적인 일을 했다면 그것은 어머니와 결혼한 것일 터였다. 그는 그저 밤마다 노래를 했으며 술을 마셨다. 그런데도 그는, 동식으로서 감히 경멸하거나 저항할 수 없는 이상스러운 존재였다. - 본문 280쪽
실질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어 오면서 겉늙어 버린 어머니는 아버지 생전엔 그의 눈치를 보며 살았고, 이젠 두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산다. 겨우 오십 나이인데 머리엔 백발이 내렸고, 손등엔 송장꽃(검버섯)이 가득 폈다.
동생 동영은 어릴 때부터 말없이 잦은 가출을 해 왔다. 동영의 어두운 시선과 침묵은, 불안한 어린 시절의 방황과 가출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식의 가족은 모두 아팠다.
한때 방탕한 생활과 방황은, 동식에게 치유되기 힘든 육체적 병을 남겼다면, - 동식은 육체적 병으로 군 복무를 면제받았고.-
동영의 침묵 속에 담긴 아픔은 점점 더 강한 정신적 통증을 수반했다.
동영은 군대를 다녀와서도 말없이 사라지곤 하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고, 어머니와 동식은 늘 동영의 상태를 걱정했다.
아버지도 가출의 습관적 고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 혼자 방황하다가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는 이 모든 비극적 상황을 다 삭히지 못한 채 가슴속에 켜켜이 싸여가는 통증을 달고 살았다.
'소풍을 가자'는 어머니를 따라 동식 형제는 덕적 군도가 바라보이는 서해를 찾았다.
썰물 진 그곳에는 오래전 갯벌에 버려진 녹슨 붉은 닻이 여러 개 있었다. 수많은 목선들이 이곳에 닻을 내렸다가 썩어가고 남은 풍경 같았다.
썩은 목선, 녹슨 붉은 닻은 수많은 운명들의 잔해 같았고, 동석에겐 붉게 녹슬어 버린 닻이 자신의 가슴에 꽂히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어머니는 개흙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던 동식은 고개를 들었다.
동영은 보이지 않았다.
동식은 녀석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배반하지 말아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계를 다시 어둠 속으로 밀어 뜨리 지 말라고 말해야 했다. 할 수 있다면 사라져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해, 산 그림자가 드리워진 해안을 향해 동식을 빠른 걸음을 걸었다.
바다가 들어오고 있었다.
바다는 오후 내내 서서히 물러가며 새겨놓았던 완급한 물결 자국을 하나둘 다시금 덮어오고 있었다. - 본문 298쪽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동영은 변한 것이 없었다.
동식은 체머리를 떨며 중얼거렸다.
"왜 너는 변하지 않았냐"
······· 노을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동영)의 어깨는 단단해져 있었으며, 눈빛도 잘 영글어 있었다.
"형은 왜 아팠어?"
동영은 대답 대신 뜻밖의 물음을 했다.
"왜 술을 마셨어."
"······· "
쉰 목을 가다듬어 무슨 말인가를 뱉으려 달싹이던 동식의 입술이 얼어붙었다.
동영이 말없이 구두를 벗기 시작했던 것이다.
구두와 양말을 아무렇게나 갯바닥에 팽개친 녀석은 맨발이 되었다. 녀석은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 ······· ·······
불타는 닻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사내의 검붉은 그림자가 그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 본문 300쪽
한강의 단편 소설 <<붉은 닻>>의 결말은 독자들에게 상상하도록 남긴 여운의 공백이 작지 않아, 그 끝을 이리저리 유추해 보는 마음도 무겁다. 동영이 그대로 떠난 것이라면, 살아남은 동식과 어머니의 남은 삶도 제대로 버티어 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살아서 함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지켜간다면, 서로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 주련만····· 이 가족에겐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함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동식은 자신이 겪고 있는 심리적 고통과 정체성 상실을 이해하려 애쓰지만, 과거 자신을 떨쳐내지 못한다.
동영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지탱하고 있었다. "붉은 닻"의 상징은 그들이 지나온 삶의 한 부분과 닿아있었고, 자의든 타의든 현실에 이끌려 가는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기도 했다.
동영이 실제로 떠난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어떤 변화를 겪고 다시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독자들에겐 더 혼란스럽다. 저자와 동영은 많은 여백을 독자들에게 남겨주고 각자 제 갈 길로 떠났다.
썩어도 형체가 남겨진 목선과 녹슬어도 석양에 붉게 빛나던 닻의 관계는, 처음과 끝이, 과거와 현재가 서로 이어져 있는 것을 투영하는 것일까? 떠난다고 해서 모두 싹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변한다고 해서 원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 삶은 더 고달프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한다.
* 『붉은 닻』은 『여수의 사랑』 책에 담긴 6번째 마지막 단편소설이다.
한강은 만 23살에서 24살이던, 193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책 속"에 담긴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을 집필했다. 2007년 개정판을 내며 한 번 손을 보았음에도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 2018년,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