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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 - 한강의 단편소설

'네 몫까지 살려니 내가 미치겠다', 그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by Someday

나(영현)는 청량리역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야간열차에 관해 친구 동걸에게서 처음 듣고, 관심과 호기심을 갖게 된다.

태백선을 따라 어둠에 싸인 산과 계곡을 지나, 동트는 새벽엔 동해역에서 바다를 마주할 수 있는 야간열차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그러나 현실 속 나(독자)는 작년 7월 금요일 청량리 발 15:08 KTX에 올라 16시 38분 강릉역 도착하는 동안에도 살짝 지루했던 기억만 난다. 1994년과 2024년 사이 30년이란 세월에 폭삭 시들어버린 열정을 탓해야 하려나. 결국, 태백선 야간열차 체험은 『야간열차』 책 속에서 하기로 하고, 영현과 동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두르지 않고 딱 '무궁화 열차'의 속도로!


건장한 동걸은 이따금 친구들이 권하는 말술을 당하지 못할 때가 있었고, 친구들에게 음모라도 털어놓듯이 속삭이곤 했다.

'청량리역에서 밤 열한 시에 출발하는 기차가 있어. 제천에서부터 태백선을 타고 산맥을 넘는다. 마침내 기관차가 어둠을 뚫고 새벽에 이르면 동해역에서부터 바다를 보며 달린다·······" 동걸은 그 영동 태백선 통일호가 서는 역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었다. 태백선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추전 역사를 지날 때 차창 밖에 일렁이는 어둠과 묵호역과 옥계역을 잇는 광막한 해안선을 묘사할 때면 그의 눈은 이상스러운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 본문 147쪽

친구들은 동걸의 장광설을 들고, 모두 함께 가보자며 동걸이가 안내를 하라고 의견을 모았지만, 동걸은 자신도 야간열차를 타본 적이 없다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젊은 혈기의 친구들은 다음 날 밤 열 시 삼심 분에 청량리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동걸이만 나타나지 않았다.

동걸이를 기다리다 발차 시간을 놓친 차표를 환불한 일행은 그 돈으로 역 근처 싸구려 술집으로 가서 동걸이를 성토하며 잔을 비웠다.


영현이가 바라볼 때, 동걸은 자신과 달라 보였다.

'동걸은 일분일초를 맹렬하게 싸워나가고 있었다······· 영진은 서커스에서 불을 토하는 사나이를 떠올리곤 했다······· 이글거리는 불꽃은 마치 사나이의 내장 깊숙한 곳에서 당겨진 것 같았다······· 절망을 모르는 괴물, 아무것도 토해낼 수 없는 자의 눈물을 모르는 괴물, 나는 그를 시기하기 때문에 비웃고 있었다·······' - 본문 151쪽

영진은 그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내심 부끄러워했지만, 그런 동걸도 당당한 모습이 심하게 흔들릴 때가 있었다.

동걸은 이명(耳鳴) 때문이라며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짓눌렀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허공을 비껴 바라보며 "기차 바퀴 소리······· "라고 중얼거렸다. 영진은 동걸의 서늘한 시선이 닿은 곳을 가늠할 수 없었고 가끔 들려주던 동걸이 술에 취해 들려주던 야간열차 이야기조차 어쩐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영현은 군 입대를 앞두고 친구들과 야간열차를 실행에 옮겨보고 싶었지만, 동걸은 완강히 반대했다.

결국, 동걸은 청량리역에서 몇 번의 손을 흔들어주곤 고집스러운 뒷모습을 보이며 역사 밖으로 사라졌다.

영현은 외로웠으며 동걸이 그리웠다. 동걸의 행동은 거칠었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방심하게 하는 따스함이 있었다.

'영현이 넌 마치 장난으로 살아보는 사람같이 굴지만, 실은 이 세계에 가장 잘 적응할 녀석이야. 그래서 네가 부러웠다. 넌 잘 해낼 거야. 전날 밤, 환송회에서 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며 동걸은 그렇게 말했다. 큰 형님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동걸의 표정이 내 기분을 언짢게 했었다.' - 본문 153쪽


제대를 했지만, 영현은 가을 복학(復學) 일도 놓쳐버린 채, 시간만 흘러갔다.

영현은 모든 일에서 서둘지 않았고, 서울에 첫눈 대신 진눈깨비가 흩어지던 날이 되어서야 동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현은 퇴근을 하고 나타난 동걸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했다.

그의 손은 따스하고 끈적끈적했다. 문득 외로운 생각이 든 영현은 얼른 손을 빼내었다.

자정이 가까울 때까지 영현은 동걸을 놓아주지 않았다.

동걸은 잔을 비울수록 과묵해지고 있었다. 몸집이 큼 동걸의 침묵은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영현은 그 벽에 균열을 내고자 했지만, 그 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포장마차를 나섰을 때, 굵은 눈송이들이 몽롱하게 빛나며 보도블록에 내려앉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동걸이 두 귀를 감싸 쥐면 주저앉았다. 동걸은 기차 바퀴 소리가 들린다면 이마를 땅에 찧으며 이를 악물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거대한 벽이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영현은 놀라서 동걸을 일으키려 했으나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함께 주저앉아 버렸다.

'이건 또 어디 숨어 있던 자식인가' 술에 취해 있던 영현의 의식은 명료해졌다.

동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영현 입대 전 돌아가신 영현의 어머니를 묘지에 묻을 때 꼭 한 번 보았던 동걸의 눈물방울이 거짓말처럼 연달아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이날 밤 술에 취한 영현은 동걸의 지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동걸의 어머니와 여동생 선주를 처음 만난다.

더욱 놀라웠던 건, 다음날 아침 방구석 이불에 쌓여 있던 동걸의 쌍둥이 동생 동주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동주는 14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서부터 새벽마다 형 동걸과 함께 우유 배달을 다녔는데, 동걸이가 아팠던 날, 동주 혼자 두 사람 몫을 하다가 비탈길에서 굴렀다. 겨우 산소마스크를 틀 뗐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게 벌써 십 년도 넘었고, 재활원에서도 회생 불능이라고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동걸과 선주는 동주의 회생에 대해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동주의 예후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 상태에서 더 고생인 것은 어머니였다. 밤과 낮을 작은 아들에게만 매달려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동걸 오빠는 동주 오빠가 저렇게 된 후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조급해하고 종종 무섭게 화를 내고, 누구보다도 완전하게 살려고 해요. 내가 보기엔 마치······· 누워 있는 동주 오빠의 몫까지 살아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술에 취해 돌아오면 동주 오빠 어깨를 붙들고 일러나라고 고함치곤 하죠. 네 몫까지 살려니 내가 미치겠다······· ' - 본문 173쪽


사진 출처: 픽사 베이 무료 이미지

영현은 그날 밤, 10년 만에 다시 야간열차를 탔다.

10년 전에도 영현은 동걸을 혼자 버려두고 떠났었고, 이번에도 동걸을 두고 떠났지만,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함께 노래할 사람도 없었다.

영현에게 떠나는 것은 간단했다. '내가 어디에 있든 세상이야 달라질 것이 없었다' - 본문 178쪽

무엇에도 속한 곳이 없는 그에게 떠나는 일이나 머무르는 일이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걸에겐 달랐을 것이다.

그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고, 동걸이 어디 있는가는 동걸이와 가족에겐 완전히 달라질 세상 살이었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동걸을 부러워했다.

대체 복무로 짧은 방위 생활을 했고, 번듯한 직장과 더 이상 방황할 필요가 없음을 자랑하는 듯한 동걸의 당당한 모습을 선망하고 있었다.

'이 바보들아.' 그들에게 영현은 속으로 말했다. '저 녀석은 우리를 오래전부터 배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야.' -본문 183쪽


동걸은 벽제에 동주를 안장하고 혼자 동해로 떠났다.

아니, 영현과 함께 떠났을 것이다.

역에서 동걸을 배웅만 하고 돌아섰던 영현은 움직이기 시작한 열차를 향해 사력을 향해 달렸으니까.


<<야간열차>> 책 속에 동주의 죽음을 직접 묘사한 곳은 없다.

다만, 새벽녘에 술 취한 목소리의 동걸이 더 심하게 술 취해 있던 영현에게 "오늘 나와 함께 벽제에 가자"라는 집요한 목소리의 전화를 한 것이 그 단서일 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동걸은 더욱더 떠나지 못했을 것이고, 동주가 떠났을 때만이 동걸은 야간열차를 타고 떠날 수 있었을 테니까.



영현은 동걸의 젊음이 아슬아슬하게 고갈되어 가는 상황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지켜보며 청춘을 보냈다.

한때 유행하던 '아프니까 청춘'이란 성장의 계기가 되었던 메시지도 동걸에겐 사치스러운 말이었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동주는 동걸의 분신이기도 했다.

동걸의 묵직하고 어두운 현실을 지켜본 영현 역시, 형 집에서 형수의 잔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살고 있었고, 심한 무력감으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청춘을 흘려보내며 겉늙어 갔다. 그런 영현도 친구들 중에 가장 늦게 직장을 잡았지만, 제법 잘 적응하며 살아갔지만.

가족이란 무엇인가?

매일매일 같은 장소에서 부딪히며 살아가거나, 독립해서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일상적이지만, 어린 시절 사건 사고로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남기기도 하고, 장애나 사고로 평생 돌보아야 하는 가족도 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그 떼어낼 수 없는 고리가 누군가에겐 평생의 지울 수 없는 심신의 장애로 깊이 각인되는 -동걸과 동주처럼- 아픈 존재이기도 했다.

우리들이 흘려보낸 청춘이, 내가 지나쳐온 세월이, 여기저기 금이 간 상태로 영현과 동걸의 '바수어진 젊음' 위로 한동안 오버랩 됐다.



* 『야간열차』는 『여수의 사랑』 책에 담긴 3번째 단편소설이다.


한강은 만 23살에서 24살이던, 1933년 10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약 일 년 동안 이 책 속"에 담긴 단편소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등을 집필했다. 2007년 개정판을 내며 한 번 손을 보았음에도 몇몇 문장들과 크고 작은 장면들을 다시 고치고 다듬어 2018년, 『여수의 사랑』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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