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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May 13. 2023

오이로 변신한 파파야멜론

그 많던 언어천재들은 모두 어디로...

백만 년 만에 L마트를 갔다. 요즘, 모든지 일단 '안 한다'로 시작하는 아들. 이유를 물으면, '갑자기' 싫어졌다 하니, 그저 그렇구나 할 수밖에 없다. 도서관 안 간다는 아들에게, 일단 책은 반납만 하고 옆 마트에 들러 달달한 것을 골라보는 것으로 협조를 구했다.


오랜만에 큰 마트에 오니, 동네 슈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과일이나 채소를 건져가고 싶어졌다. 어서 사탕코너로 가자는 아들을 달래며,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파파야멜론을 샀다. 얼핏 보면 개구리참외처럼 생겼는데 그보다 매끈하고 속은 하얗다. 파파야멜론을 먹어본 적은 없으나, 파파야와 멜론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가득할 것 같았다.


달달함을 채워 넣은 아들은, 도서관으로 향해 다섯 권 정도의 책을 골라왔다. 어떻게 고르는 책마다 이렇게 재미있느냐고 칭찬을 해주면, 으쓱해진 기분이 표정으로 새어 나온다. 창문 너머로 다른 아이가, 전에 빌렸던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엄마, 호박씨...' 하며 반가워한다. 문 닫기 오 분 전에 도서관을 나서며 아들은 말했다.


"도서관 재밌어."


다음 주 토요일, 똑같은 씨름이 시작될 것을 알면서도, 이 순간의 긍정적 평가가 과히 듣기 싫지는 않다. 네게 도서관이 재미있는 곳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오늘... 그것으로 충분해.




활동량이 평소보다 많았는지, 당이 급격히 떨어졌다. 침대에 누워 신랑에게 파파야멜론 좀 깎아달라고 했다. 처음엔, 멜론 잘라오듯, 껍질은 그대로 둔 채로 속을 싹 걷어내어 네 등분으로 길쭉하게 잘라왔다. 과육을 조금 더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부탁하니 그제야 필러로 껍질을 까서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잘라 포크를 올려주었다.


기분 좋게 한 입 베어무니, 상상 속 파파야멜론은 온데간데없이, 물맛이 먼저 느껴지는 오이였다. 처음엔 몰랐다. 그냥 이런 맛인가 보다 했다. 경험치가 전혀 없었으니. 봉지에, 맛이 없으면 100% 환불, 교환해 준다는 자신감에... 그냥 원래 이런 맛인가 믿을 뻔했다.


친절로 둔갑된 복수였을까. 싱크대 한편에 철저하게 발라낸 달콤한 속 모음이 그릇에 담겨 있었다. 게다가, 나름 위생을 생각했는지 자신의 손으로 조몰락거린 과육을 정수물에 헹궈내어... 행여나 단맛이 남을세라... 신랑은 하나에 삼천 원이 넘는 파파야멜론을 용하게 오이로 변신시켜 놓았다. 아무리 권해도, 쳐다도 보지 않던 그 태도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알고 있었던 게야...




엘랑비탈 작가님께서 소중한 시간을 내어, 한 시간가량 홈스쿨에 관한 인사이트를 들려주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울림은, "아이가 영재여서 홈스쿨을 한 것이 아니라, 홈스쿨을 통해 아이의 영재성을 발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신랑이 홈스쿨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막연히 겉으로만 '알고 있다' 생각했던 홈스쿨 이미지에 선뜻 오케이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초, 중, 고 12년의 시간을 조금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시야를 확장시켜 주신 엘랑비탈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아이를 영재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또래보다 조금씩 늦음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더욱 너만의 속도로 열심히 즐겁게 가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러나. 엘랑비탈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영재성의 발현과, 아이가 지닌 가능성의 실현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아이들은 언어천재로 태어난다고 했다. 그 많은 천재들은 모두 어디에 가고... 영어(과목) (학습으로) (억지로) 하기 싫다는 목소리가 교실의 반 이상을 채울까.


신랑이 그 달콤한 파파야멜론을 오이로 희석시켜 버린 것처럼...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있던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가진 진짜가... 희석되어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희석: 아이들의 가능성 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하시는 선생님들의 노력과 별개로, 조직과 시스템의 한계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초등학교를 가든 홈스쿨로 교육을 받든 관계없이... 아들이 가진 포텐이 온전히 발현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오이야,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 귀한 오이야. 네가 결코 파파야멜론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한 것은 아니다. 다만, 파파야멜론은 본연의 맛을 간직했어야 한다는... 알지? 오해 말고 섭섭해 말자.)


<EVERYONE is A GENIUS> by Stefan Waidelich, Nikhila Anil


A story inspired by the quote — "Everyone is a genius. But if you judge a fish by its talent to climb a tree, it will think all its life that it is stupid."


https://brunch.co.kr/@ssk6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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