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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Lee Feb 14. 2023

이 원장의 이중생활

자꾸 어디를 그렇게 가.


유치원 하원 차량에서 내리면, 아이들은 놀이터로 곧장 우르르 달려갔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외진 곳을 찾았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고 조용한 응대에, 상대도 따라 주춤하며 목소리를 낮춰 묻는다.


"거기 000 아닌가요?"

"아 네, 맞아요"

"방 있나요?"


무슨 밀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사업장으로 걸려온 반가운 문의 전화를 이렇게 받다니. 정상적인 주인장의 태도는 아니다.

 

동네에선, 예전엔 공부방 원장이었고 지금도 가끔 영어 수업을 나가는 선생님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새로 이사한 동네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이중생활 초기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어린이집을 함께 다녔던 아이와 노는 시간이 점차 많아지고, 유치원 들어갈 때쯤 필요한 정보들이 늘어나면서 아는 동네 엄마들이 조금씩 늘었다. 아이들 영어에 대해 침 튀기며 말하던  '이 원장'이, 고시원의 '이 원장'이기도 한 것을, 동네에선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 두 분야에서 모두 원장으로 불리니, 이중생활에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지조가 있다. 이 와중에 다행인 것은, 어린 아들이 '고시원'이란 단어를, 고시원을 매도하고 난 이후부터 입에 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말이 늦게 트인 아이도 아니었는데. 아무튼 효자다. 동네에서 신분이 탄로 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아들 덕이다.


공부방 원장 능력이 넘쳐, 고시원 사업도 동시에 하고 있다고 기개 넘치게 알릴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게 뭐 숨길 일이라고. BUT. 난 내 발로 들어가 사기를 당하고 원치 않는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때맞춰, 아파트 단지는 연일 신고가를 찍는 부동산 분위기에, '전세'를 살고 있는 내 위치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전세 계약 삼 개월 만에 집값은 두배로 뛰었다. 당시, 부동산 말만 듣고 집값을 싸게 내놓으면, 법적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하루에도 대여섯 집이 이사를 들고 났다. 어수선해진 동네. 점차 집을 소유한 여인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자격지심에 스스로 불편한 사람이 되어갔다.


번듯해 보이는 공부방을 운영했고, 아이를 국제학교 보내고 싶은 부모님들 소원 풀어드리며 선생님 소리 듣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걸래를 손에 쥐고 층계를 오르내리는 고시원 원장 혹은 아무에게나 막 불리는 아줌마가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배웠다. 당신이 무엇을 끌어당겼는가에 따라.


그러니까. 내가. 대체. 무엇을. 끌어당겼을까. 나는 단지, 현금이 흐르는 소박한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데. Sounds simple, huh?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시스템 뒤의 현실은 넘어야 하는 건지, 피할 수 있으면 굳이 겪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는지 판단조차 할 수 없이 난감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이한 것이라면 더더욱.


시스템.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고, 현실을 마주하며,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며 꿈을 이루면 행복한 삶이라고 믿어 왔는데... 마음이 급해진 건, 자리를 잡고 여유롭게 생활하는 친구들을 보면서였다. 현실감 없이 꿈을 꾸며 외국생활을 즐거워했던 베짱이. 이상적인 교육에만 달떠있던 내게 들려온 소리.


목소리 1.

"에이 뭐... 집이야 팔아야 돈이지. 누가 뭐 이렇게 오를 줄 알았나. 그래도, 부동산 아니었음 내가 이십억을 어떻게 벌었겠니.'


목소리 2.

"오랜만에 좀 쉬고 왔어. 하룻밤 오십만 원 하는 호텔이 좋긴 좋더라. 다음엔 너도 가봐. 00 섬. 우리 담엔 어디로 갈까?" (매년 서너 차례 동남아 해변 투어를 하는 멤버에게 묻는 말)


목소리 3.

(신랑이 생활비로 천만 원씩 갖다 준다 자랑하던 그녀가) "애들 학원비에 생활비에 남는 게 없어. 미안해. 여유가 없어서."(가까운 사이 돈 거래 하는 거 아니라더라.)


아들이 아직 백일도 채 되기 전이었다. 프리랜서 신랑이 석 달 치 월급을 부도 맞았다. 비즈니스 파트너가 미국에서 파산 신고를 해서, 이쪽에선 구제받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신랑은 극강의 업무 스트레스로 사람이 괴물로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감내하면서 견뎌 온 시간들도 함께 공수표가 되어 날아갔다. 신랑은 괴물에서 좀비로 변신했다. 넋을 잃고 더 이상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다가도, 공부방 수업이 시작되면 톤 업 된 목소리로 아이들을 맞았다. 하루하루가 별로였다.


코로나를 방패 삼아 신규 모집이 힘들다는 이유로 공부방을 접었다. 코로나의 위기를 기회 삼아 더 성장한 원장님들을 안다. 어떤 분야든 상위 1%는 꼭 있다. 언제 어디서나 야무지고 탁월한 존재들. 살아남으려 했다면 공부방을 어떻게 해서든 운영해 볼 순 있었겠지만, 나의 무능함이 아닌, 누구나 납득이 갈 만한 이유 속으로 숨어버리기에 적당한 때였다. 그리고, 이미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이 원장 머릿속엔 말도 되지 않는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쉬워하는 학부모님께는, 새로 시작하는 일이 사회적으로 기여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ㅁㅊ 소리를 했다.


준비 없이, 공부하지 않고 내 발로 뛰어 알아내지 않고, 해당 기관에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남의 말만 듣고, 그 말만 믿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순간. 어둠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어리석은 한 인간이 나를 불렀다 이건가'


전 고시원 원장이 2년 이상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해 미치고 팔딱 뛰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원장님이 호구 대타가 되어, 그녀를 살렸다고 후에 장기 입실자들이 말해주었다. 코로나가 최악이었던 때다.


어둠은 삶에 대해, 사람에 대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중생활은 끝났고,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이 새삼 고맙다.


어느 날 아이가 난데없이,

"엄마 고시원 가?" 냐고 물었다.

"고시원? 왜? 엄마 이제 고시원 안 가."

아이는, 인형들을 몰고 가며 쓰나미가 와서 고시원으로 간다고 했다.

이중생활 당시 쫄깃한 긴장감이 스쳐갔다.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 준 아이를

가만히 안아보려 했으나,

쓰나미를 몰고 이미 저만치 가버렸다.

그놈의 쓰나미.


신랑이 초콜릿도 없이 문자로만 달랑

Happy Valentine's Day라고 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힘이 되어 준 신랑이기에

그깟 초콜릿쯤...

그냥 넘긴다.


Happiest Quotes To Live By Everyday - DIY Da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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